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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p.9
나는 바보가 아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멋진 모습들로 무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명명할 수 없는 고통, 두려움 자체를 자각하지 못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절박성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것을 만난 심장이 달려가 그것을 끝장내느라고 여러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p.115
"문학에서 모든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지.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건 초심자의 생각이야. 경험부족에서 나오는 거지."
p.168
존재하지 않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더욱 존재하고 있었다.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나를 광고하는 셈이었다.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나의 추악함이 맨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다.
p.196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中
+) 내가 프랑스 소설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로맹 가리'라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일 것이다. '에밀 아자르'는 바로 그 '로맹 가리'이다. 이 책은 에밀 아자르가 청년 시절부터 60세가 될 때까지 40여년을 쓴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것을 달리 생각한다면 그만큼 글을 써내려가기 어려웠고, 쉽게 손대기 힘든 작품이란 말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혹시 철저하게 자전적 소설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것들이다. 이 책의 맨 처음은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소속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작가라는 탈에서,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왜 자기 이외의 것과 관련지어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일까.
작가는 그런 형식을 싫어한 듯 하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문학을, 소설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으나 그것도 작가가 의도한 것이지 않을까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책을 읽은 후 생각한다. 나도 나와 내 주변의 것에서 도피하기 위해 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