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이 울리는 것은' 길에 거꾸로 처박힌 전봇대, 전선 몇가닥이 혓뿌리처럼 드러나 있다 물과 양분 대신 전류를 실어나르던 저 잿빛 나무는 서 있는 일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제 생애를 다했다 종일 비 내리고 처박힌 전봇대에 아직 전류가 흐르는지 손바닥이 징- 징- 울린다 네 비참보다도 네 비참을 바라보는 나의 비참을 견딜 수 없어 내리친 것이 너의 뺨이었다니! 손바닥이 울리는 것은 처박힌 전봇대 때문이 아니라 빗줄기 때문이 아니라 서 있는 일에만 몰두했던 나의 수직성 때문 나희덕, <야생사과> 中 +) 인간은 '야생'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잃어버린 근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기억에서 잊혀진 근원을 찾아 더듬더듬 홀로 길을 걷고 있다.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숲에 관한 기억] 부분) 주변을 잃어버리자 중심도 잃어버렸다. 주변을 발견하지 못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도 모르게 새어나가고 있지는 않을까. 내면의 힘, 인간의 근본적인 에너지가.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물방울들] 부분) 더 늦기 전에 시인은 사람들이 '나'에서 벗어나, 나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그것은 야생으로 돌아가는 기본적인 첫 걸음이다. 이 시집은 소통의 불가능으로 인한 어려움과 그것을 깨기 위해 말을 내뱉으려는 화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삼킬 수 없는 것들은 / 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삼킬 수 없는 것들] 부분) 그것은 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인 내면에 존재하는 야생에 대한 그리움이다. 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원하는 것이다. 내가 나희덕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잘 만들어진 글 덩어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끌어낸 덩어리를 글자로 잘 구성해 놓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풀냄새가 그리워지는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