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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그 말을 하도 듣다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따라하게 되더라.” 아버지는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언젠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 p.14 [구멍]
“브레이크 패달을 만들면서 나는 살면서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되었지. 그건 잘 멈추는 일이거든.”
- p.20 [구멍]
내 등을 긁어주면서 그가 말했다. “사람은 순간을 무서워해야 해. 자네가 비겁해진 순간이 있었다면 그 한순간이 평생을 따라다닐꺼야.”
- p.70 [등 뒤에]
타다 남은 고무장갑, 다리가 부러진 상, 물에 젖어 반쯤 녹아버린 비타민C..... 이런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버려진 물건들을 보면, 한겨울에 쇠로 된 난간에 이마를 맞대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다. 그 안에 깃들인 슬픔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 p.212 [무릎]
윤성희, <감기> 中
+) 윤성희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의 글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구성이나, 어찌보면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작품들의 나열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사람을, 꿰뚫어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하다.
나는 윤성희가 지닌 촌철살인의 시선이 부럽다. 그것은 사물을 객관화시키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관성이 냉정함을 잃지 않기에 객관화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녀의 글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소설이 지닌 자유, 그러니까 허구와 비논리적이어도 괜찮을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논리적이다.
그것마저 작가가 계산하여 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윤성희의 작품에는 신뢰가 간다. 정성껏 썼다고 해야 할까. 정성껏 썼다는 말이 믿어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가끔 나의 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이러한 논리성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