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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평점 :
얼굴이란 어떤 경우든 은폐와 신비화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야 상징과 표현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환원된다. 스무 살인 나의 얼굴은 날마다 껍질이 벗겨지는, 아직 역할을 얻지 못한 쓸쓸하고 적막한 탈이었다.
p.11
"늘 그런 걸, 그런다고 크게 실패할 것도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니?"
"사소하니까. 지금 나의 생이란 어차피 너무 사소한걸. 이걸 하든, 저걸 하든, 뭔가를 하든, 아무 것도 하지 않든 차이가 없어."
p.21
"청춘은 누구나 고아지."
p.55
"스무 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
p.168
전경린,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中
+) 스무 살의 방황으로 물든 생의 혼란스러움이 소설 전체에서 묻어난다. 누구나 청소년일 때 성인이 되길 꿈꾼다. 나이가 어려서 하지 못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한다. 그러나 정작 성인이 되면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지지 못해서 괴로워하거나,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몰라서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스무 살 초엽의 당황스러움을 잘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속 인들들처럼, '청춘은 누구나 고아'다. 자신의 모토를 찾지 못해 떠돌고 스스로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으로 힘들어한다. 전경린은 인물들과의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주인공의 혼란스러움을 비교적 차분하게 제시한다. 생에 처음인 것들, 그것에 대한 호기심은 그것들을 더욱 어마어마한 것들로 만든다. 하지만 정작 경험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스무 살의 인생은 그렇게 호기심으로 만들어낸 열정과 기대, 실망, 그리고 깨달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