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솔시선(솔의 시인) 3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創자에 대하여'

 

 

옥편을 뒤지면

비롯할 창이다.

옥편풀이와는 달리

創자에는 상처란 뜻도 있다.

創傷이란 의학 용어로도 쓰인다.

창조와 상처가

한 글자 안에 동거학 있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상처입는다.

한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날개를 다친 새는

더 멀리 날기 위하여

다시 어둠의 벼랑을 탄다.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친 다음날

섬의 벼랑 아래 떨어져 있는

수많은 바다새의 흰 주검들을 보라.

 

고호의 해바라기가 내뿜는 불꽃의

눈부신 암흑을 보라.

기원전 십수세기

은나라 유적에서 발굴되는

뼈에 새겨진 최초의 기호가

태어날 때의 아픔을

글자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피를 흘린다.

 

 

허만하,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中

 

 

+) 허만하의 이번 시집에서 '수직'은 산자락을 자르거나 강을 가로지르는 힘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의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시공간의 틈을 만들어내는 기준점이 된다. 하지만 그 기준이 화자에게 이쪽 혹은 저쪽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지는 못한다. 화자는 말한다. "나의 풍경에 이데올로기는 없다"([사하라에서 띄우는 최후의 옆서] 부분) 그에게 수직으로 서서 죽는 비는 "고독과 같은 것"이다. 릴케처럼([프라하 일기] 부분)

 

이 시에는 강, 비, 눈, 물, 물안개 등의 고정화되지 않는 부정형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화자의 내면 심리를 반영하는 시어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움 혹은 고독, 쓸쓸함, 기다림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화자에게 강은 무엇인가. 강을 끼고 달리는 행위가 그의 감정을 정리하는 표현이며, 강은 정착과 출발의 양면성을 간직한 곳이다. 또한 결국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상징까지 갖고 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 서걱이는 갈숲에 떠어지는 / 가을 햇살처럼 / 강의 최후는 /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낙동강 하구에서] 부분)

 

누군가 생을 위한 길을 걷는 다면 시인은 생을 따라 강을 따라 흘러간다. 이 시집은 대부분 그렇게 풍경을 바라보고 소박한 시인의 생각을 적으며 전개한다. 어떤 색깔이나 소리가 눈에 띄는 작품들이 없기에 아쉬움이 남지만 잔잔한 생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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