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겨진 셔츠'

 

 

벽에 셔츠가 걸려 있다

겨드랑이와 팔 안굽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

바람과 구름이 비집고 들어가도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작은 박새도 도로 날아 나온다

저 옷을 벗어놓은 몸은

오늘 밤을 자고 나도 팔이 아프겠다

악착같이 당기고 밀치고 들고 내려놓았을

물건들, 물건 같은 당신들,

벽에 셔츠가 비뚜름히 걸려 있다

오래 쥐고 다닌 약봉지처럼 구겨진 윤곽들,

內心에 무언가 있었을,

內心으론 더 많은 구김이 졌을

 

 

문태준, <그늘의 발달> 中

 

 

+) '시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한 짐 가득 지게를 진 아버지'가 '굴을 빠져나와서 혹은 길가 비석 앞에서' '잠시 잠깐 가쁜 숨을 고르시던' 모습을 시인은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시집을 내자고 여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첫 두권에서 보지 못한 시인만의 아버지의 원형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아버지가 끌고 다닌 손수레를 직접 만지면서 "누가 이 손수레를 끌고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며 "손수레인 나를 일없이 끌고 다닌 이"에 대해 추억한다. ([손수레인 나를]) 몹시 추운 날, "옆이라도 이런 옆은 없었으면 싶게 옆이 어는 날"에 그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는 상상을 한다.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추억, 그것으로도 시인은 충분히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추운 옆 생각])

 

그것에서 시작되었을까. 사랑에 대해 중얼거리는 화자의 목소리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오래도록 은은하게 지속되는 촛불같은 사랑이었다.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로 그려지는 화자의 사랑. 그것은 갑자기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그런 사랑은 분명 아니다. ([百年]) 

 

문태준의 이번 시집에는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의 시집처럼 놀랄만큼 예민한 사물을 관통하는 눈보다도, 여린 시적 감수성을 잘 제어하며 적어낸 글귀들이 돋보인다. 종종 그의 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어쩜 이렇게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의 구사를 상상하게 만들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한다. 참 배울 것이 많은 시인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