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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죠. 우리가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에요. 때로는 눈물이 우리를 구해주기도 하거든요. 울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을 때도 있는 거죠.
p.139
선생님은 낙관주의자시로군요. 아니,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단지 현재의 우리 모습보다 더 나쁜 건 상상할 수 없을 뿐이죠. 글쎄요. 나는 불행이나 악에 한계라는 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을 받더니, 마치 혼자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지. 그것은 모순을 내포한 결론이다. 결국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거나, 아니면, 비록 모든 증거는 반대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제부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p.204
존엄성이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인생이 모든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p.238
나에게는 불평할 권리가 없소. 남들이 감당하는 무게 때문에 내가 먹고 사는 거니까.
p.258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中
+)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을 읽고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개개인이 집단을 형성하여 사는 것에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혼란의 순간에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오직 자신의 목숨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다. 이 소설은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엄청난 스케일과 무게감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살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 앉은 인간의 치졸한 모습과, 그것을 모른 척 외면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할 때 오직 나만 앞을 본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의사의 아내'처럼 책임감에 겯디다 못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타인과 같아지길 바랄지도 모른다.
잔인한만큼 리얼하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술술 읽히는 것이 꼭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흥미롭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된다. 언제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르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렇게 동물적인 습성을 간직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이런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그런 본성이 모습을 드러낼텐데. 생각만으로도 씁쓸하고 두렵다. 인간, 본성, 본능 그리고 생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