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릿 - 한동원 장편소설 담쟁이 문고
한동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저 새이, 저리 오만 각을 다 잡아도 결국은 여자에 목숨 거는 놈인 거고, 그런 면에서 놈이나 나나 다를게 없었다. 그래, 어차피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아무리 우아와 심오와 진지와 엘레강스의 탈을 쓰고 있어도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동물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 있지 않다. 게다가 동물스러운 게 인간스러운 것보다 나쁜 것도 아니다. 가만보면 인간들 중 이른바 '짐승보다 못한 짓'이란 걸 하는 놈들도 얼마든지 있고, 반대로 성인(聖人)이라고 불리우는 인간들만 다른 경지를 그냥 평상시 라이프스타일로 삼는 동물들도 많지 않은가.

p.75

 

그래. 이제는 개척민들이 결국 그 터널을 지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세계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넘지 않으면 안 될 거대한 산맥이나, 그 너머에 있다는 약속의 땅 같은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꿈꾸는 약속의 땅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해 있으리라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은 그곳의 이름을 빌려 천국의 꿈을 꾸는 자신들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p.369

 

 

한동원, <삐릿> 中

 

 

+) <삐릿>은 락음악의 'ㄹ'자도 모르는 '나'가 마음에 드는 여학생 앞에서 폼잡기 위해 기타를 배우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온전히 그 이유뿐이었으나 락음악에 대해 알아가면서 점차 음악 연주하는 것에 빠져든다. (물론 여전히 그 여학생을 위한 마음이 크지만) 그덕에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에 얽히게 되는데, 남학생들만의 대화가 제법 흥미롭다. 또한 자기의 마음을 주었던 여학생에게서 뒷통수를 단번에 맞아버린 주인공의 정신적인 성장도 눈여겨 볼만 하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일찍 눈을 떠버린 '수은'의 마지막 편지도 흥미롭다.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 만들어낸 사건은 오히려 슬프기까지 하다.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먼저 알게 된 소년에게서 이미 음악에 대한 열정은 멀리 있는 이상처럼 여겨졌으니까.

 

중간 중간 고교밴드를 분석하는 음악평론가의 시선은 락음악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편견이나 고교 밴드에 대한 오해, 그리고 당시 사회적 시대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은 락음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같은 독자들은 음악가에 대한 정보나 음악에 대한 정보 없이 작가가 사용하는 문장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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