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
전아리 지음 / 포럼 / 2009년 7월
평점 :
서른 중반이 넘어서까지 선볼 때 입을 와이셔츠를 직접 다리고, 혼자 아침을 챙겨먹는 남자가 아닐 수 있어서 안심이었다. 왜 다들 말하지 않던가. 결혼은 정신 차릴 새 없이 후다닥,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고.
결혼 후 아내는 곧장 화를 냈다. 그녀는 툭하면 '당신은 내가 아닌 누가 이 자리에 있어도 상관없었을 거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굳이 부정하거나 아내에게 성을 내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p.26
내가 토끼가 된 이후로 할아방은 나와 마주칠 때면 '세상살이 다 연출 잘 하는 놈이 이기는 거여'하며 비장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p.50
삶이란, 말 없이도 굴러가는 수레 같다. 말을 풀어버리고 나면 그대로 멈추어 버릴 것 같던 바퀴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구르고 있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속도가 좀 느려졌다는 것. 그래서 인지 지나가던 행인들이 제멋대로 하나 둘씩 올라타기 시작했다는 것 뿐.
p.57
"자기 자신을 좀 믿어 봐요. 아이캔두잇, 유캔두잇, 위캔두잇!"
그러자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믿음처럼 사,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게 또 이, 있을까."
p.143
전아리,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 中
+) 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났다. 전아리, 이 소설은 흥미로운 소재와 현실을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일상적이고 편안한 문체, 소설 구성이 잘 짜여 있어서 미흡함이 없는 작품이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어렸을 때부터 문학상의 대부분을 휩쓴 문학천재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것이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나, 작가의 성실함이 부러웠다.
어느 날 이혼하게 된 남자는 토끼가 되어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오해를 거듭하게 만들어 남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버린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경쾌한 문장과 발랄한 상상력이 압권이다.
결혼,이라는 것. 그냥 연애하다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관문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의 남자도 충분히 이해가 되나, 그의 아내도 이해가 된다.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믿어서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다. 이혼이 해결책은 아니나 이혼으로 인해 자기 안의 자신(토끼)를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연출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연출 잘하는 사람이 잘 사는 곳이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남자의 탈출은 새로운 목표와 꿈을 가져온다. 연출이 아니라 진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세상은 신뢰감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시사하고 있는 점이 많은 소설이다. 그것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편안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