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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절 ㅣ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머리맡에는 아직도 산소마스크가 있었다. 에메랄드비치 파이프와 은색 가스통도 함께. 침대 주위에는 알코올과 에테르의 냄새가 진동했다.
파리 한 마리가 어머니의 이마에 앉았다. 나는 어머니가 파리를 쫓으려는 몸짓을 하기를 기다리면서 두 손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위층에서 소리를 질렀다. 햇빛은 큰 회색 타일들이 박힌 둔탁한 바닥 위에 물결쳤다.
p.87
정원으로 나오자 내가 말했다.
"돌아갈까?"
"응. 이 짐승들이 슬퍼 보여."
"갇혀 있는 데 적응이 되었을 거야. 우리는 모든 것에 적응하며 살기 마련이야."
"모든 것은 아니야."
"네 말이 맞을 거야."
p.104
"이 새장은 예쁘지 않은데 왜 잘못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니?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어. 나 자신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p.128
"새는 좋아하지만 그렇게 가두어두는 건 싫어요. 제 정원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편이 좋습니다. 저 자신이 이미 새장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인데 다른 존재를 가두어둘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p.212
다치아 마라이니, <방황의 시절> 中
+) 보험사에 다니지만 돈은 제대로 벌지 못하는 아버지, 그가 좋아하는 유일한 일은 자기 돈을 써가며 만드는 새장, 팔지도 못하는 그것때문에 모든 시간을 투자한다. 현실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로 인해 이 집의 유일한 가장은 어머니이다.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일을 다니면서 근근히 살아간다. 어머니의 몸이 몹시 아픈 날 회사에서 보내준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으나 단순히 쉬면 낫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는 죽는다.
이 집의 딸, 엔리카. 열일곱 살 엔리카에게 어머니가 말하는 조언은 두 가지였다. 부자집 남자를 만나라, 그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라. 하지만 엔리카 둘 중 하나만 지켰다. 부자집 남자 체사레를 만났으나 그에게 그녀는 육체적인 관계를 위한 사람일 뿐이었다. 엔리카가 만나는 남자들은 돈으로 유혹하는 늙은 변호사나, 무조건 몸을 요구하는 체사레와 그의 아버지와 같은 부류들이다. 그리고 돈으로 남자를 사려는 백작부인 밑에서 일을 하며 타락한 어른들을 보게 된다.
엔리카에게 옳은 길을 제시해 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엔리카 스스로 찾아야 하는 길이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찾아 떠나야 하는지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으며 그녀는 현실을 견뎌간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누구하나 격해지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에 메마른 현실을 더 절실히 표현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