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대림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나를 쓴 작가는 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거의 모두 시를 썼고 종종 결과물을 냈다. 시는 내게 깊은, 억제할 수 없는 호감으로 남아 있다. 시인들의 허영심이라는 죄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사인을 해서, 번호를 매긴 한정판의 그 소책자들. 수집가들의 거만한 태도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중략)

 제대로 쓰여졌고 상당한 두께의 줄거리를 가진 산문이라는 사실로 만족하기도 한다. 사실 그것은 일반적인 특권은 아니어서, 내 시리즈에서도 별로 널리 퍼져 있지는 않다. 살아남기 위한 희귀한 제목들. 서점에서의 내 첫 출발에 대한 기억. 매우 위대한 작가 같은 태도를 가졌던, 지금은 기억조차 되지 않는 작가들. 어쨌든 지금보다 나았다. 즉흥적으로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진짜 작가들에게서 에피소드를 훔쳐내고 있는 지금보다는.

pp.61~62

 

 눈길도 주지 않는 수많은 책들 한가운데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30여 년을 보냈다.

 가끔 이동이 되기는 했지만 결코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그는 낙담할 만했다. 좌절감만 가득 안은 채 이런 곳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최악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책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것을 시인하려는 책은 거의 없다. 부끄러움이다. 내가 볼 때는 애처로운 부끄러움.

p.79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책의 자서전> 中

 

 

+) <책의 자서전>의 부제는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이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책'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에게 읽혀지길 기다리며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이전의 주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주인이 바뀌면서 가게 되는 책장 속 다른 책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책이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부제를 따르자면 분명 인기 있던 베스트셀러였으며, 소설의 내용에 힘입으면 이 책을 쓴 작가는 시를 쓰지 않았고, 시리즈로 책을 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무엇인지 혹은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가 아니다. 책이 언급하고 있는 다른 책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다른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책을 선택하는 주인에 대한 시선도 흥미롭다.

 

책은 세 명의 주인을 거쳐 또 새로운 주인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시간은 30년이 넘게 지났고, 독서하는 사람들의 취향도 달라졌으며, 새로운 매체의 개발(텔레비전이나 모뎀)로 책의 입지가 달라졌다. 그런 상황에 고민하는 책의 모습을 통해 '안드레아 케르베이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책의 위상이 달라지면서 작가들의 입지도 달라졌고, 그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이다.

 

이 책은 1999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는데, 당시 작가가 영화 혹은 인터넷에 밀릴 책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 놀랍다. 그의 말대로 영상물에 의해 책의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 책은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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