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두 손으로 다케오의 입을 막았다.

"아무 말 하지마."

또 한 번, 자기가 지금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 그보다는 괴로운 표정으로 얘기하는 다케오가 가슴 아팠다.

"말하지마."

다케오는 맥없이 미소지었다.

가령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혐오감 내지는 권태감 같은 것을, 한쪽은 느끼는데 다른 한쪽은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다케오는 과연 언제부터 헤어짐을 생각한 것일까.

p.13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p.16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탓에, 변화없는 날씨가 감각을 뒤틀어 놓는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구별이 불분명해진다. 하기야 그런 편이 내게는 편했다. 하루하루의 윤곽이 흐릿하면 흐릿할수록 매사에 대한 인식과 현실감도 엷어진다. 10년이든 20년이든 지금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pp.37~38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中

 

 

+) 소설 속의 '리카'와 '다케오'는 8년을 만난 연인임에도, '다케오'가 '하나코'를 스치듯 본 지 4일만에 헤어짐을 선언한다. 불행한 것은 그런 다케오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코는 다케오를 전혀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는  다케오를 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리워한다기 보다 아예 헤어짐 자체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옳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최악은 그 둘의 보금자리였던 공간에 하나코가 들어와 리카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헤어진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와 사는, 헤어짐을 당한 여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코를 바라보며 참 책임감없이 사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지만(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자신의 남동생이었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코는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인생에 끼어들어 그들의 삶을 망치고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의 생명줄을 놓아버리다니. 정말 무책임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상처가 아프다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상처를 주고 그것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행동이다.

 

리카, 무엇을 바라고 하나코를 받아들인 것인가. 다케오와의 인연과 상관없다고 중얼거려도 결국 그 인연으로 돌아가는 여자. 스스로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다. 리카가 한 행위는 사랑도, 집착도, 연민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조금 불쾌했다. 이런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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