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떴다
김이은 지음 / 민음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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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여자의 얼굴은 없다. 여자는 잠깐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모습이 사람들이 본 내 얼굴이구나. 여자는 이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보는 걸 똑같이 보게 됐으니까. 여자는 이제 진짜 웃는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막으로 가서 얼굴에 와 닿는 뜨거운 태양빛을 느낄 수 없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이제 앞선 사람의 그림자만 놓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p.68  -[외계인, 달리다]

 

-넌 뭘 잊을 건데? 뺨에 파여 있는 흉터를 잊으면 되겠네. 아예 그런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거야. 아님,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던가. 죽음이든 망각이든 문 혹은 벽이 된다는 사실은 똑같잖아. 그건 그럻고, 모니터에 나비들이 수십 마리가 있는데 움직이질 않으니까 꼭 박제된 것 같다. 그렇다고 동영상으로 제작할 수도 없으니.

p.186   - [지진의 시대]

 

35년 동안 맨몸으로 살면서, 사는 게 온몸에 상처 자국을 내는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치 껍질 속의 달팽이처럼 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 안에서 시간을 소비했다. 내 생각엔 모든 소비 중에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겼는데 1년여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결과가 고작 조기 폐경과 골다공증이라니.

pp.204~205  - [이건 사랑의 노래가 아니야]

 

 

김이은, <코끼리가 떴다> 中

 

 

+) 읽다보니 예전에 읽었던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를 지었던 소설가였다. 그때 그 작품을 읽으면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는데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어쩌면 사람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나랑 무척 닮았으리란 예상을 해본다. 김이은의 소설은 몽환적이다. 현실인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작법으로 현실이 맞나 의심스럽게 만든다. 비현실에 치우쳐 있더라면 그런 생각을 못할텐데, 어디까지나 현실에 기대고 있기에 가능하다.

 

이 소설집에서 서술자에게 '돌아간다'는 의미는 자기 안의 본거지, 그러니까 근원이다. [가슴 커지는 여자 이야기]에서 '심율처'로 제시된 곳은 "마음이 따라 흐르는" 곳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는" 공간이다. 그 마음은 곧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사람들은 "가슴을 씻어 내고 편안하게 누워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서술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의 구분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공존하여 살아가는 곳은 아닐까. 서로 상처를 남기지 않고 타인의 얼굴을 보며 자신을 발견하는 곳.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다고 믿을" 수 있는 편안함, 그것이 설사 가면을 쓰고 만나는 만남들일지라도 서로 균등하게 선입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도 괜찮다. ([외계인, 달리다] 부분)

 

상대방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또한 보더라도 공감하지 못하는 세상에 상처받은 존재가 현실에는 아주 많다. 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공간은 작은 방일 뿐이다. 자기 안에 갇혀 세상에 발을 내딜지 모르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고개를 내미는 행위는 생명에 위험을 감지했을 때 뿐이다. 그렇게 나와도 세상은 여전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 서술자의 상처를 못본 척하게 되고 결국 더 큰 상처를 입고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내면의 상처가 외부의 상처보다 더 컸음을 말이다. ([이건 사랑 노래가 아니야])

 

김이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매력적인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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