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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결국 돌아올테니까.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에겐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 속으로 들어가, 이윽고 사라지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를 향해 떠난 뒤, 거기서 다시 돌아오지 않은 선조들이란 도무지 우리에겐 없으니까. 결국 모두 돌아왔으니까. 결국 자살이 아니면 월북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수평선 안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
p.13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게 됐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번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다.
p.100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p.201
김연수, <여행할 권리> 中
+) 김연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작가는 문학과 인생에 대해 상당히 진지한 사람같다는 것이다. 물론 여느 작가가 그러하지 않겠냐만은, 어쩐지 김연수의 글은 소설과 산문을 가르지 않고 내게 심각한 느낌을 전달한다. 간혹 그런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그가 갖고 있는 문학이 아닐까 싶다.
산문집이라고 하여 손을 뻗었는데 가벼운 이야기를 실어 놓은 책이 아니라 깊이 있게 생각해볼만한 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행을, 결혼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 이건 그에게 여행이 아니라 문학을 위한, 작품을 위한 삶의 궤적이지 않을까. 그것을 따라 그것을 찾아가는 여행이지 않을까.
아주 가끔 김연수의 글에 바람을 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좀 더 가볍게, 좀 더 쉽게, 좀 더 재미있게. 그렇다면 독자들이 부담이 덜한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모처럼 웃으면서 산문을 읽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나열한 경험담이 훨씬 삶을 닮은 웃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