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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ㅣ 시작시인선 82
길상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껍질의 본능'
사과 껍질을, 배의 껍질을 벗기면서
그들 삶의 나사를 풀어놓는 중이라고
나는 기계적인 생각을 돌린 적 있다
속과 겉의 경계를 예리한 칼로 갈라
껍질과 알맹이를 나누려던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몇 점씩 달라붙던 과일의 살점들,
한참 후 쟁반 위 벗겨놓은 껍질을 보니
붙어 있는 살점을 중심에 두고
돌돌 자신을 말아가고 있다 알맹이였던
그녀의 빈 자리 끌어안고 잠든 사내처럼
버려지고도 제 본능을 감당하고 있다
이미 씨앗은 제 속을 떠났지만
과일 빛깔은 살갗에 선명하게 남았다고
그 빛깔 향기로 다 날릴 때까지
안간힘 다하고 있는 껍질들,
너무 쉽게 변색되어 갈라지던 마음을
저 껍질로 멍석말이 해놓고
흠씬 두드려 패고 나면 다시 싱싱해질까
말려진 껍질 속에 드러눕고 싶었다
길상호, <모르는 척> 中
+) 젊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세를 이루는 환상적이고 형식파괴적인 시를 쓰지 않았다는 점에 우선 좀 새로웠고, 기존의 전통 시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전통시학을 구성하는 젊은 시인 한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게 된 듯 하다. 시인은 "몇 개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며 / 오래오래 걸은 후에야 / 집 하나 겨우 얻"은 것처럼 시를 썼고, "불안한, 너의 생을 눕혀놓고서 / 살살 다독이고 싶었"던 간절함으로 시를 썼다. 왜냐하면 "상처는 상처로 치유될" 것 같았기에 그에게 상처는 시를 태어나게 하고 시로 그것을 감싸게 만든다. ([물의 집을 허물 때] 부분)
우리는 누구나 "한 마리 이무기였다 / 천년을 기다려야 여의주 물고 / 승천할 수 있다는 불완전의 생"을 살아간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저 완고한 바위를 깎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걸어야 할 수많은 고난과 시련의 생이 완전을 꿈꾸는 것은 아니겠으나, 걸으면서 살아가면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넘어가는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강에서 시작된 수 천리 길, / 숱한 상처들 힘이 되어 / 여기 와 꿈틀대는 것이리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그것은 곧 "나의 길이 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탁족은 뜨거워라] 부분)
그렇게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인연들, 사람 혹은 사물 그리고 자연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시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아니, 그 인연과의 만남을 만들어가고 지켜가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이므로. ([돌탑을 받치는 것] 부분) 흔들리는 않는 생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람 그리고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