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298
김기택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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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김기택, <껌> 中

 

 

+) 김기택의 시가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할지 느슨해졌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존에 갖고 있던 사물에서 이끌어낸 엄청난 상상력의 힘이, 그 꼼꼼하고 촘촘하던 사유의 고리가 느슨해진 기분이 든다. 표제작 '껌'은 그가 지금까지 써온 기존의 시들과 다르지 않지만, 그밖의 대부분의 시들은 그만의 시작법에서 벗어났다. 물론 그가 즐겨 사용하는 사물을 꿰뚫어보는 참신한 시인의 시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으로 대부분의 시를 이끌어가던 힘을 손에서 놓은 듯 하다.

 

이를테면 다음 구절은 역시 김기택이다라는 확신이 들게 한다. "지하철 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 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 /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삼겹살] 부분)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이번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이런 식의 작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껌] 부분) 질겅질겅 씹어서 뱉어버린 껌에 남아 있는 이빨 자국을 통해 그의 과거와 기억을 일깨운다.

 

사물이 존재했던 곳, 혹은 사물이 존재했던 때, 그렇게 시인은 과거의 시공간을 아우르며 현재의 사물에 사유를 입힌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기존에 써왔던 촘촘한 사유의 연결이 아니라 한순간 떠오른 상상의 그림에 불과한 느낌이다. 어쩌면 시인에게도 여유가 생겼을지 모르겠으나, 그 여유로움이 시에서 느슨함으로 느껴진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싶다. 그만의 동화적인 상상력의 펜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만, 과거의 열정이나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생각의 고리가 풀린 것 같아서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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