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크 Peak - 젊은 작가 10인의 테마 소설집 ㅣ 현대문학 테마 소설집 1
이기호.해이수.김설아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이것은 십수 년 전 어느 날, 내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십수 년 전 일을 새삼 여기에 다시 꺼내든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내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 그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윤리이다. 오직 그 윤리 때문에 이야기는 존재하는 것이다.
p.69 -이기호,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시멘트 공장을 떠나서, 잠시 어디에 계셨는데?”
K가 물었다. 사실 중요한 부분이다. 인생에 어떤 길이 있다면 말이다. 그 길 사이사이에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릴 때가 있다. 대개는 사소하게 지나치게 되지만 아주 간혹 우리는 그 구멍을 들여다 보느라 시간을 한참 흘려보내기도 한다. 아빠도 그런 시기를 지난 것이다.
p.156
이제는 나도 알지만, 익숙함이란 한 알 진통제와 같은 것이다. 통증의 근원까지는 치유하지 못해도, 당장 아픈 구석을 달래주는 진통제. 아빠의 뒤늦은 성장통을 달래준 것은 다름아닌 엄마가 주는 익숙한 애정이었을 테다.
p.165 -김서령, [이별의 과정]
시간과 노력과 게다가 돈까지 들이부었는데 손에 떨어져 딸랑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미련 없이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한 나이는 먹어도 결코 인생을 깨닫지는 못한다고 엄마는 믿어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해보지 않는 것, 결코 믿지지 않는 것, 인생이란 남는 장사의 이치를 절로 터득하며 완성되어 가는 법이다.
p.211 -염승숙, [적의 꽃잎]
이기호 외, <피크> 中
+) 피크, PEAK, 어떤 현상이나 사물, 사람의 기운이 가장 승한 상태, 성공적인 상태, 최선의 상태.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집은 열 명의 젊은 작가가 롤러코스터의 가장 최상 지점에서 느끼게 되는 피크 상태를 중점으로 소설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피크 상태를 주된 것으로 작품을 썼다기 보다 젊은 작가들의 생기발랄하고 신선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 더 정확할 것이다.
김이은의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남편과의 애정이 식은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한다. 그 두번째 남자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 불안해하는 여자와 달리 그 상태를 즐기는 사람인데 어느날 여자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작아지고 싶다고 간절히 바랬던 마음때문인지 여자는 정말 남자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젠가 내가 상상했던 소설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아니 더 세밀하고 솔직하게 묘사되어서 꽤 놀랐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명지현의 [목표는 머리끄덩이]는 후배와 바람을 핀 남자친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처절하게 혼내주느냐를 청소년들에게서 배우게 되는 장면은 상댕히 유쾌했다. 또한 이기호의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을 읽으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는데, 그것은 적나라하게 소개되는 예비 소설가의 상당히 꼬여버린 어느 하루를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가장 피크에 도달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김서령의 [이별의 과정]은 우리가 살면서 선택하게 되는 수많은 길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자의 모습과 선택한 길 외의, 그러니까 선택받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형상화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모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이 외에 다양한 작품들이 있는데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시각이 흥미로운 소설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