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참고 견뎌야만 가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생을 꿈꾸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때로는 견뎌서 얻은 것이 없는 삶이라서 시간을 느낄 수가 없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읽어온 책들의 숫자로만 가끔씩 점검되고 확인된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 이후의 날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책 속에 미래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책 속에는 온통 오늘과 어제뿐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과거가 또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될 것이 분명하다.
p.23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삶을 살면서도 이정도면 괜찮다고,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곳이 있는 삶이 낫고, 그저 묵묵히 견디고 참아가면서 사는 것보다는 단번에 부수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삶이 낫다고 생각해.
p.129
나는 다른 사람의 시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무얼 하든 어떤 식으로 살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기를 파괴시키는 행위에 관해서는 두렵긴 하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영향을 받을 누군가가 있다면 곤란하다.
p.255
박주영, <백수생활백서> 中
+) 이 소설 속의 서술자가 있는 상황에 내가 있더라면 어땠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나도 그런 삶을 꿈꿔보곤 한다.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과 나의 차이점은 그녀는 책을 소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도서관이라는 문화적 혜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어쨌든 나는 다음 구절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유 구조를 갖고 있을까. 대상에 대한, 그러니까 적어도 '책'에 대한 서술자와 나의 생각은 놀라울만큼 일치했다. 그만큼 책을 소유하고자(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다. 책을 읽을 시간을 뺏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별 핑계도 다 있다고 하겠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진실이다. 문제는 책 읽을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균형,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경제적인 논리에 해당한다. 노동을 하고 수입을 얻어 다시 새로운 생산을 만들어내는 논리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창출해내지 못하는 백수에 해당한다.) 작지만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에 기대어 산다. 스스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타인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책을 읽으며 살 수 있는 삶이 그녀의 전부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장편소설이라기에는 스토리가 너무 단순하고, 제법 중복되는 작가의 주장이 반복되어 나와서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내용 전개에 별 문제가 없으니 좀 참고 읽을 수 있다. 쓰고 읽는 것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쩜 이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책을 읽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물질적인 세상에서 노동력 창출이라는 거창한 틀에 한 몫할 수 있는 일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런 우습지만 부러운 생각을, 오늘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