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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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위인전 속 인물들을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로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하는 행동에 확신이 있었는지. 겁나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냉동창고 담벼락에 기대앉아 속엣것을 올리면서 나는 반드시 유관순 언니를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다.

p.69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그냥 글자만 쓰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마음을 깊이 뒤집어 밭을 가는 것도 같고. 맘속에서 찌개를 끓이는 것도 같고."

p.137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p.220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p.256

 

 

김형경, <꽃피는 고래> 中

 

 

+) 김형경의 소설을 읽다보면 감정의 절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는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공장을 지을 때까지 자신들의 바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순간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그들은 그렇게 바다를 잃었다. 외지인들이 등장하면서 할아버지는 고래를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의 공장을 반대하면서부터 나라에서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 고래잡이를 금지시켰다. 졸지에 할아버지는 고래를 잃고, 자신의 삶을 잃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게 되고 한순간에 홀로 남게 된다.

 

그렇게 한 순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그 잃어버린 것을 단 한번이라도 느껴보고자 기회를 만든다.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고래를 잊지 않기 위해 고래 박물관을 만들고,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고래 잡이 배를 몰며 바다로 뛰어든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열정이며 삶이며 희망이다. '나'는 잠재된 분노를 친구에게 터트리고 정신적인 성장의 고통으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그것도 할아버지와 고래잡이 배를 경험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이라는 걸. 누구도 확신이 있어서 자신의 길을 걷거나 꿈을 갖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들이 상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한다. 설사 그림이 좀 달라지면 어떤가. 여러번 고쳐가야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법이다. 그것처럼 삶도 많은 수정을 거쳐야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김형경은 이 모든 이야기를 감정을 싹 뺀 절제된 어조로 그린다. 그것이 오히려 더 슬프고 안타까움을 유발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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