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장갑' 너는 파충류의 영(靈)을 가졌다 탈피 후에도 줄지도 늘지도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네 속을 드나든다 불륜은 용감한 법 너와 만날 때 나는 가장 뻔뻔해져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욕실이든 주방이든 이목구비 지워진 얼굴처럼 지문 없는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가면의 시간들 백주에도 붉디붉은 손이다. 욕망이다 너는 강기원, <바다로 가득 찬 책> 中 +) 이 시집에는 시인의 오감 혹은 육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각에 대한 그의 애착은 남다르다. "이슬 판 수푼, 검은 공포 두 뿌리, 구름 한 덩이 고름 두 덩이" 등의 "마음 그릇에 재료를 고루 섞어 곱게 갈아" "잘 씹어" 먹으면 "진한 '인생의 색'"을 맛볼 수 있다. ([언어로 가득한 주방]) 화자는 자신이 미각을 살려 감정을 분쇄하고 적절히 흡수하려 한다.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감정에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태도에도 드러난다. "사랑하는, 망설이는 널 끌고 / 용문으로 가야지 / 허기진 네게 / 인상 깊은 만두를 먹여야지 / 만두소처럼 나로 너를 / 온전히, 맛있게, 그득하게 채워야지" 화자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인간으로 빚은 만두를 선물하고자 한다. 자신으로 만두소를 넣어 빚은 상대를 채우는데 쓰고 싶어 한다."([만두]) 화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것. "마늘, 생강, 고춧가루 / 듬뿍 뿌려 맛깔스레 무쳐"서 "그대 혀끝에 / 올려"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절여진 슬픔]) 다시 말하서 화자는 맛으로 육화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달콤 쌉쌀함, / 이게 나의 콘셉트야" ([그린티 아이스크림]) 화자는 먹을수록 자꾸 먹고 싶어지는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지정한다. 미각 외에도 촉각과 시각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시를 잘 버무리고 있는데 비교적 간단한 구성으로 (보통 한 음보로 한 행씩 구성하고 있다) 작품을 구성한다. 그만큼 소박한 언어로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노력한 시집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