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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는 그의 코끼리와 같은 것들이 하나씩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산책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것들 말이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잠들 때, 코끼리도 잠들었다. 물론 잠들려고 누워 있으면, 거기 심장에 와서 닿는 코끼리의 발이 느껴졌다. 언젠가 다시 코끼리는 발에 힘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또 그때가 되면 그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스핀이 먹힌 서브를 바라보는 심정이 되겠지만,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지금은 우선 산책부터. 걸어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그는 적절하게 피곤한 상태로 잠들 수 있었고 그걸로 족했다.
p.29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옴 샨티 샨티 옴. 갈라 페스티벌에서 인사말을 하던 사람들마다 마무리할 때 쓰던 진언. 그 뜻을 알려준 사람은 앨리스였다. "옴 샨티는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뜻해요. 그걸 세 번 반복하는 건,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 그리고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에 생긴 고통에서 풀려나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는 뜻이지요."
p.111 - 이혜경, [그리고, 축제]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팔십 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p.115 - 정지아, [봄날 오후, 과부 셋]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말어. 알았지? 왜냐하면, 확실허지 않은 것을 말허면 아부지 어무니가 피해를 본게."
p.145 - 공선옥, [보리밭에 부는 바람]
김연수 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中
+) 올해의 이상문학상 선정 경위에 '무게 있는 중편소설'의 후퇴가 지적되었다. 그만큼 현대 소설이 장편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출판 산업이 주춤하고 영상 산업이 확대되면서 '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고로 선택한 것이 장편소설 문학상을 만들어내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에 빠지고 있다. 물론 장편 소설 문학상을 지정한 것은 배고픈 작가들과, 좋은 작품에 목마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중편소설이나 단편 소설의 위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시와 소설 모두에서 환상적인 문학, 그러니까 현실을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이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간과하는 불친절한 작가들을 싫어하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오고가는 쏠쏠한 재미를 주는 작가들은 반기는 편이다.
어찌되었든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은 제법 '무게 있는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었다. 대상을 수상한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의 경우 인간 내면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성찰적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혜경의 [그리고, 축제]는 여성으로서 겪기 힘든 상처를 안고 아파하며 그 고통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는 것이 일품인 작품이었다. 정지아의 [봄날 오후, 과부 셋]은 봄날 오후, 노년의 과부 셋의 일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무협소설 형식을 빌려 현재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 박민규의 작품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면서 굵직굵직하고 무게 있는 작품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본연의 것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인간 내면의 고통 혹은 위악, 사회 내부의 거짓 혹은 진실 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