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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 2008
문학나무 편집부 엮음 / 문학나무 / 2008년 2월
평점 :
"그런 얘기를 함부로 남발해선 안 돼요. 모르는 사람들한텐 더욱 그렇죠." "왜요?"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렇게 말로 다 해버리면 행복이 달아난대요. 행복이 달아나면 불행의 씨앗만 남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남 앞에서 너무 행복해 해서는 안 돼요. 질투가 바로 불행의 씨앗이니까요."
p.31 - 김희진, [해바라기밭]
양파를 체로 걸러내자 곧 흐무러져 버렸다. 누렇게 쭈그러진 늙은이의 몸 같았다. 단맛을 다 내주고 남은 찌꺼기였다. 복닥거리며 살아봤자 결국엔 이렇게 된다. 모두가 이렇게 되려고 기를 쓰고 사는 거다........ 체를 탁탁 쳐가며 건더기를 잔반통에 버렸다.
p.63 - 명지현, [그 속에 든 맛]
가장 가까운 대상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되는 세상의 아이러니에 저항했지만, 나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모든 사랑이 자기 자신을 담보로 하듯이, 나는 내 안에 들어온 생명에게 존재의 일정부분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늙어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p.291 - 한지수, [배꼽의 기원]
김희진 외, <젊은 소설 2008> 中
+) 오랜만에 젊은 소설 작품집을 읽었다. 등단한지 3년차 이내의 작가들이 쓴 작품 가운데 (각기 다른 잡지에로 등단한) 10편을 선택하여 실은 소설집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지대 문예창작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작년에 읽은 <젊은 소설 2007>보다 좋은 작품이 많았다고 느끼진 않았으나, 최근 등단한 젊은 작가들의 문제나 작품 경향을 살펴보기에 편리한 책이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특히 전혜정의 [해협의 빛]은 시체를 건져올리는 병사들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라 끔찍했다. 어쩌면 그렇게 잔잔한 어투로 소름끼치는 모습들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놀라웠다. 김희진의 [해바라기밭]은 사랑과 복수, 그 사이 '가학적인 행위'가 연결되고 있다. 주고 받는 원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평론가의 해설에는 큰 무리가 없다.
명지현의 [그 속에 든 맛]과 배지영의 [몽타주]는 가장 정통적인 소설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몽타주]에서 주인공은 몽타주를 그리면서 오히려 기억했던 인물이 사라져버리는 역설적인 느낌을 갖게 되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인물의 형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게 되는지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현실 속의 공범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 기억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드러나는 것이 아닐가.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인상적인 작품이 없다. 김희진, 명지현, 배지영의 작품이 내게 끌리는 건 다른 작품들의 몽환적인 특성 때문이다. 작품의 분위기가 몽환적이거나 소설의 제재가 환상적이라서 나와 맞는 작품이 없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