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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ㅣ 랜덤 시선 34
최명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숟가락질'
왼손에 잘못 쥔 숟가락 오른손에 옮겨 쥐는 데 평생이 걸렸다
때론 밥상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몸을 떨었다
왼손이 아는 기억 말끔히 지워내야 오른손이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한 기억을 철저히 비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숟가락질을 반복했던가
복작거리는 뱃속의 그 은밀한 작업을 내 어찌 알랴만
목구멍이 막혀도 이를 악다물고 나는 왜 먹어야 했는지
평생의 숟가락질이 아카데미즘을 넘고 도를 넘고 사상을 넘는다
숟가락질이 법이고 밥이고 똥이다
숟가락을 응시하며 벌린 입으로 욕설과 하품과 꿈과 시대가 줄을 꿰고 몰려온다
먹고 나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와도 해가 뜨지 않는다
이제 왼손은 상대치 말자
오른손의 입장을 왼손이 차마 알 리 없다
소금에 꽉 절여진 심장으로 나는 오른손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고
오늘의 통곡이 왜 어제의 통곡과 같은지에 대해 물었다
평생의 숟가락질은 평생의 집요한 아픔을 쥐고 흔드는 일
아픔을 쥐고 뒹굴다 잠자리 날개처럼 말라버린 이 묵묵한 손
오른손은 이리 오래 말이 없다
최명란,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中
+) 최명란 시인의 작품에는 주인공이 많다. 작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깨달음을 배운다. '꼬막 캐는 여자', '보도 블록 까는 청년', '대리운전사', '병원에 입원한 환자', '아이를 가진 여자' 등등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의 삶을 둘러보며 시인의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바탕으로 삼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 배움의 생(生)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과 어제가 지속되는 삶,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이 같지 않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집 중반부에 넘어서서 시적 대상들을 찾아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그 내면을 들춰내고 있다. '홍시', '봄눈', '닭발', '배꼽' 등에서 인간의 생과 얽힌 사유의 고리를 구체적으로 대상을 파고들며 풀어내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작품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기분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 나온 작품일까,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 특별한 것이 있을리는 없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