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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1999년 4월
평점 :
시간은 지나간다. 아니다. 시간은 정지해 있고 내가 그 곁을 지나쳐간다.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특급호텔 주변의 건물들을 스쳐지나갔듯이. 그 건물의 수많은 방을 일일이 두드려보지 않고 그냥 무심코 지나쳐 걸었듯이.
중요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 일이다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그보다는 말야, 내일이 와도 네가 내 곁에 없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일이라는 말을 희망의 의미로 쓸 수 없게 만드는 거야. 거꾸로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도 살아 있을 테고. 그리고 또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눈물에 젖어 있던 너의 그 눈, 몇시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물었고 그걸 듣자 내 입에서는 뜻밖에 의젓한 농담이 튀어나왔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라고.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는 지금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생각한다. 어딘가 사계절이 있는 곳에서 달력이 들어왔다. 그 달력에 삶을 맞추면 된다. 그러나 그는 복잡한건 바로 달력이라고 다시 바꿔 생각한다. 해라는 구별은 필요없다. 그냥 살아가면 된다. 그는 구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쪽]
은희경,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中
+) 돌이켜보니 내가 은희경이라는 소설가의 글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때 신경숙의 소설에 푹 빠져 신경숙의 문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을 때, 은희경은 그저 손에 닿는 소설가로만 여겼던 것이다. 왜 그저 그런 작가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었을까. 얼마전 은희경의 소설을 읽고, 또 다시 꽤 오랜만에 오래전에 쓰여진 은희경의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나는 은희경의 소설을 재밌다,라고 평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재미있다라는 말과 흥미롭다라는 말은 별게라고 생각하는데, 은희경의 소설은 흥미로운 쪽에 더 가깝다.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고 애절하다. 격정적인 감정의 흔적으로 묻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애절한 것이 그녀의 작품이다. 지독하게 차분하고 냉기있는 서술자의 어조가 작품마다 독자를 숨죽이게 만든다.
때로는 그 무게감이 지나쳐 책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 한켠이 더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손에서 놓기에는 무언가 아쉽다. 은희경은 생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그런 안타까움과 헛헛함을 읊고 있다. 서술자가 인물에게는 제법 가까이 다가가도 독자와의 거리는 좁히지 않는다. 그로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작품의 말미까지 끌고 나가는 것이다. 바로 그 냉정한 거리 두기가 그녀만의 개성이라 생각된다.
분노 혹은 고통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구현해내기란 굉장히 어렵다. 부럽게도 작가는 감수성 짙은 용어를 배제하고도 끓어오르는 욕망 혹은 분노의 감정을 착실하게 적을 줄 안다. 그의 글자를 따라 안타까운 삶의 애절한 공간들을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