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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마리오네뜨
권지예 지음 / 창비 / 2002년 1월
평점 :
산다는 것은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인가봐요. 불행이든 고통이든 말이지요.
-[고요한 나날]
지치고 힘들 때, 누름돌에 눌린 것처럼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불가하해한 인생의 중압감이 느껴질 때, 자신이 견뎌야 하는 자신 만의 무거운 추를 떼어내지 못할 때, 남자 역시 이 세상에서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존재를 지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순식간에, 단 한 번의 클릭만으로 완벽하게 삭제하듯이.
하지만 남자는 또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무거운 중력만큼 또 그만큼의 부력이 삶에는 항상 내장되어 있는 거라고. 그걸 믿지 못하면 뜰 수 없다는 것을 전직 수영강사인 남자는 몸으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무물고기]
웬만큼 살다 보면 자기 인생에 관한 한 '감'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투우]
내 삶은 늘 그랬어. 늘 원하면 사라지게 장치가 돼 있었지. 그래서 나는 늘 덤덤한 척하는지 몰라. 삶이란 놈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이지. 그건 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방관자적인 내 기질인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마녀]
권지예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 中
+) 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젠가 어떤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권지예 소설 읽어봤어? 왜 그리 답답하지?" 그때는 아무 말도 못했다. 권지예의 소설을 읽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오래된 책을 집어 들고 읽었다. 그제야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선배가 지적한 '답답함'이란 책 전면에 깔린 운무같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큰숨을 몇번이나 쉬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한숨이 아니라 큰숨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작가의 필치에는 색이 보이지 않는다. 투명한 선을 긋고 있다고 해야할까. 여운을 남기는 게 아니라 의문을 남긴다. 찾고 싶으면 찾아보라고 공공연히 던져놓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걸 찾아야 할 이유조차 찾게 만드는 게 문제다.
작가가 일부러 새겨넣은 운무의 글자들은 책을 뿌옇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또 한번 큰숨을 쉰다. 나는 이 작가에게 좀 더 강렬한 것을 시도해도 괜찮다고 전해주고 싶다. 총8편의 단편 중에서 나는 맨 마지막 [사라진 마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나머지 7편의 색깔이 짙은 회색이었다면 오직 이 한 작품만이 짙은 녹색과 어두운 회색의 조합이었으니까.
스토리의 변화를 원한다기 보다 소설의 구성에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말하는게 옳겠다. 뭔가 오르락 내리락, 툭 치고 나오다가도 슬그머니 들어서는, 그런 극적 긴장감이 부족한다. 맨 마지막 한 작품만이 구성의 선이 살짝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뭔가 역동적인 삶을 그려도 충분히 괜찮다. 작가에게 여러가지 색깔을 요구해본다. 어쩐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보다 소극적인 필치라고 생각된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글을 쓰길 바란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