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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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조심하시오

맞닥뜨린 후에는 이미 경고가 아니다

 

파도가 들끓을 때

나의 눈 속에 물이 끓고

마침내 두 손을 불 위에 얹는다

깜깜한 바위들의 구멍들, 비행기

대여섯 대 낮게 날아오는 동안

새 떼가 고요하게 바위를 뒤덮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문다

 

구멍으로 만들어진 검은 돌을 넘었다

모래가 없는 해안으로

그곳은 바다가 왔다 갈 뿐 바다는 아니었다

그 아래엔 갯지렁이

마루 아래엔 들쥐

복도에서 복도로

파도에서 파도로

 

폭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서로를 통과한 후 우리는 다른 곳의 사람이 되었다

바다에서 소금을 한 줌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나는 그를 안고 바다 너머로 걸어간다

 

대피소의 나머지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나를 실종자란에 기록했다

 

 

김이듬, <명랑하라 팜 파탈> 中

 

 

+) 김이듬의 시집에는 표독스러운만큼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 넘친다. 이번 시집읽기는 무척 힘들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악을 써대는가, 그저 커다란 테두리로 보이는 '남성'을 향해 쏟아내는 소리인가. 혼란스러웠다.

 

팜므는 프랑스어로 '여성', 파탈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을 뜻한다.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말로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굴레를 뜻한다. 즉 '팜 파탈'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타고난 여성이다.

 

"들리지? 내 목소리,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 / 너와 나 오래 입 맞추게"([세이렌의 노래]) 이 목소리는 시집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특정한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불특정한 다수를 향해 퍼붓는 목소리, 유혹의 소나타이다. "초라한 절망으로는 충분히 가벼워지지 않은 근육들이 핏물에 자유롭게 꿈틀거립니다."([유령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여자, 그러니까 팜므의 운명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디로?

 

물론 아주 간혹 간간히 들리는 한숨 소리가 있다. 거기에 팜므의 안타까움이 스며있지만, 명확한 곳을 건드리기가 쉽지 않다. 단지 그녀의 세계는 여자, 여자, 여자. 팜 파탈의 최종 목적은 '명랑'이 아닐까. 독한 기운 끝에 잠시 숨 쉴 지점이 명랑이란 두 글자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표독한 기운 밑에 그 어떤 짐작을 허용하지 못한다. 그것이 안타까운 부분인데, 지나치게 잔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생각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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