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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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름대로 착착, 민국의 술꾼들의 표준적인 행보를 고스란히 따라간 것이었다. 이제 곧 닥칠 불행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러니 한심한 청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원주통신]

 

수영은 매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 장편소설 한 편만 끝마치고 내려가자.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딱 그만큼만, 딱 그만큼의 시간 동안만 현실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다시 일거리를 찾아보자........ 소설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그것으로 생활을 유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단지 딱 일 년만이라도, 지난 이 년 동안 수고 많았으니, 그러니 딱 일 년만 만용을 부리며 살아보자, 자신에게 약속했다. 그런 마음으로 매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수인(囚人)]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학부 시절 은사님들께 드리는 나의 때늦은 변명이기도 하다.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만큼 나온다고. 나는 에리아,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中

 

 

+) 이 소설집은 대체로 만화적 상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만화 속에 풍덩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며 만화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가벼운 이야기 몇 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중심 소재가 대부분 '소설'이다. [나쁜 소설], [수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도 제재로 등장하지만, 사실 소설집 전체가 그의 자전적 소설처럼 포장되어 있다.([할머니, 이젠 걱정마세요])

 

서술자의 목소리는 곧 서술자의 기억을 따라가게 하며 거기서 그의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기호라는 소설가가 소설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형식이라면 형식일테고, 고정관념이라면 고정관념일 것이다)에 오래 전부터 혼란 혹은 지루함을 느꼈으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그는 등단을 했고 한번쯤은 자신이 생각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만화적 상상력을 지닌 이 소설집은 읽을수록 그가 제시한 '우연'에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설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기존 소설에 대한 그의 소극적인 반항 태도에 살짝 웃었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 작가의 혈기로 그렇게 중얼걸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살짝 웃었다.

 

이기호의 소설은 재미있으나 삶을 돌아보기에는 조금 먼 감이 있다. 그건 작가의 생각대로 우연에 머물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것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아가기엔 그의 소설이라는 다리가 투명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소설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이 한 편 등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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