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의 시 131
김소연 지음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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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뿔 위에서

 

 

 사방천지에 잠자는 짐승의 숨소리들이, 세상 가득 상처난 식물의 코 고는 소리가, 그들이 뱉어놓은 눅진눅진한, 짙은 입 냄새가, 들숨, 날숨, 부풀어오르다 꺼지는 뒷산의 어깨가, 눈 맑은 꽃, 까칠까칠한 턱, 내 손으로 감쌌던 두꺼운 손, 늘어진 머리카락들, 길처럼 여린 길, 발처럼 예쁜 발, 코끼리 발자국 속에 무수한 개미 발자국, 흙 속에 묻어둔 사나운 발톱, 바람 한 장에 꿀 한 숟갈, 이슬을 털다 스스로 놀라는 잎갈나무 숲, 달처럼 해진 달, 물처럼 환한 물, 이윽고 별들의 정수리가 다아 보일 때 나는,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김소연,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中

 

 

+) 시집 곳곳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것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으로 치부해온 여성의 여성성, 그러니까 모성성의 울림이다. 어머니이기도 하며 할머니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가정'을 스쳐서 '시대'를 관통한다.

 

그런데 그것을 이끄는 주체는 '그림자' 이다. 여성은 천천히 사그라들면서 그림자만이 남게 된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빛의 모퉁이에서]) '길'을 걷는 존재는 그림자를 따르지 않고 자신이 그림자를 이끌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그림자는 누구인가. 그림자는 또 다른 자신이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수많은 모습의 일부이다. 시적 화자는 "자기 생을 낚기 위하여" 자신 내부의 혁명을 꿈꾼다. "혁명을 꿈꾼다는 것만큼 / 치욕적인 짝사랑이 또 있을까"([짝사랑 - 우리 시대에 대한 弟辭]) 자신의 중심부를 옮기고 싶은 화자의 욕망은 내부의 혁명을 갈망한다.

 

그것이 그림자 여성을 '여성'보다 '그림자'로 남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시인은 한 사람의 주체로 인정받고자 한다. 외적 구조에 의해 정의되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자기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안타까운 점은 보이는 것에서 멈춰버린 시상이다. 더 깊이, 한 호흡 더 깊이 들어가도 될 만한 소재들이 나열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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