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질녘에 아픈 사람 ㅣ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아무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신현림, <해질녘에 아픈 사람> 中
+) 이 시집은 두 가지 극명한 촉감이 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시인은 가난, 설움, 아픔, 고통 등의 차가움을 흑백 사진 속 낡은 이미지로 형상화하거나 '아슬아슬한 나날' 혹은 '낡은 육신'으로 그려낸다. 미스맘으로 혼자 키우는 어린 '딸'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이 희망의 등으로 따뜻함을 피운다. 그 사이에서 청춘을 보내고, 그 사이에서 현재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때로 "절망의 아들은 포기"를 선택하기도 했을 사람, "그냥 흘러가는" 하얀 구름이 되었을 사람, "가다보면 흰 구름이 진흙 더미가" 되고 흰 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기도 했을 사람, 결국 그렇게 "길가에 쓰러진"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이 있다. "아팠으나 따뜻했던 기억들이 떠밀려" 오는 사람, "서글픈 해가 질 때나 / 정선 땅 굽이굽이 출렁이는 길 위에서 / 이 풍경이 바로 인생이야," 되뇌고 있는 사람, "목메게 아름다운 기억을 굴려가며 / 끝없는 시간, 끝없이 사라진 나날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고맙습니다, 따뜻한 시간 되세요])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나'이며 '나'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나는 가끔 아프기도 했고 소박하게 웃기도 했으며 따뜻하게 가슴 한켠에 머물기도 했다. "삶을 단순하게, 더욱 단순하게 만들 것", "절망하지 말 것", "환하고 느긋하게 살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느낌을 기록할 것"([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 화자의 읊조림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독자에게 하는 말이다.
특정한 상황에 처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 삶에서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어색하지 않을까. 둥글게 돌아가는 원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으로 만나고 있다. 시인의 시가 드러내듯, 시인의 사진이 보여주듯 일상 속의 우리는 '나'이며 또 다른 '나'이다. 시집을 읽는 내내 많은 사람과 감정을 공유한 기분이다. 비교적 공감이 잘 가는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