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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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과일 두 가지를 고르면, 흰 에이프런을 두른 아르바이트생이 그 자리에서 바로 믹서에 넣고 갈아주었다. 투명한 분쇄기 안에서는, 세모지게 잘린 파인애플 조각들과 통째로 껍질 벗겨진 오렌지 속살들이 섞이고 으깨어져 휘둘리고 있었다. 파인애플과 오렌지, 오렌지와 키위, 키위와 딸기, 딸기와 사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의 주스가 된다. 아, 산다는 건 정말, 수많은 판단과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패를 아직 손에 쥐고 있을 때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잠에서 깨면 무얼 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할래요.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답니다. 하물며 내일 어디에 있든 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질 겁니다. 운명이 주는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 두서없는 진술을 듣고 있는 당신. 당신도 부디, 어디서든 살아남으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진정한 행복이란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랍니다.
[순수]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
 
 
+) 솔직히 말하자면 정이현이라는 소설가의 데뷔작을 읽고 싶었다. 어떻게 출발했는가 확인하고 싶었다. 이 소설집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렸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그녀의 데뷔작이다. 이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 처럼 남녀관계에 있어서 여성의 심리를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서술자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며 사건을 이끌어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객관적이란 생각이 드는 걸까. 건조한 문체 때문일까? 어쩌면 서술되고 있는 장면들이 자극적인 것인데도,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구사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반전이나 극적 긴장감에 도달하는 격렬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일관된 어조가 개성일지 모르겠으나 작품의 색깔을 드러내는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트렁크]는 자신의 차 트렁크에 죽어 있는 여자의 시체를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역시 여기에서도 주인공의 불륜 관계가 얽히며 진행되는데, 정이현의 소설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여자의 로맨스를 다양한 각도에서 구사하고 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정이현이 좀 더 치밀한 필치를 구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좀 더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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