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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건너기 ㅣ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너는 가끔 사람을 미치게 해. 진절머리 난다는 듯 외치던 엄마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줄 때까지 눈치 주는 아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묘하게 음침한 구석이 있는 아이. 그게 공효였다.
p.20
그냥 싫어. 같이 있으면 짜증나.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거기에 얽매여 살았겠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공효가 이후 십 대의 인맥을 모두 망친 데에는, 작은 말실수 하나에 밤을 새우는 것에는 지솔의 공이 컸다. 그래도 공효는 지솔을 미워하지 않았다. 공효는 타인을 미워하는 일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차라리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게 편했다.
p.24
공효는 멈추지 않고 호흡했다. 어린 공효가 조금씩 공효를 따라 숨을 훅, 후욱, 후우욱, 훅, 내뱉기 시작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서 기절하지 않기 위해, 중력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숨을 쉬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알겠어? 그럼 네가 이기는 거야."
"뭐를?"
"뭐든. 중력도 이기는데 뭘 못 이기겠어?"
p.36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짚기에는 삶이 너무 바빴다.
"무서워. 근데 옛날만큼 무섭지는 않아.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왜?"
"거미보다 무서운 게 많아져서."
"......잘됐다."
"뭐가 잘돼? 무서운 게 더 많아졌다니까?"
"나는 평생 저 거미를 못 넘을 텐데 너는 그걸 해낸 거잖아."
pp.47~49
모든 선택의 기준에 어린 공효가 있었다. 같이 잠수하며 숨을 참은 것도, 무중력 공간에서 기뻤던 것도, 출구 없는 우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도, 좁은 복도에 서서 하늘을 노려보던 어린 공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너를 좋아해. 공효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너를 너무 좋아한단다."
pp.64~66
천선란, <노을 건너기> 中
+) 이 소설은 성인이 된 현재의 '공효'가 어린 시절 기억 속 과거의 '어린 공효'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공효는 우주 비행사로 안전한 비행을 위해 자아 안정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공효는 어린 공효를 만난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의식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나'와 '무의식 속 기억 내 나'의 만남, 즉 자아의 만남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공효는 어린 시절의 공효를 만나면서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하나 둘 떠올리기 시작한다. 왜 아파했는지, 왜 힘들어했는지, 어떻게 견디고 있었는지, 어떤 점이 속상했는지 등등을 어린 공효와의 만남으로 생각한다.
그 시절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을 지금의 공효가 하나씩 헤아리면서 어린 공효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공효는 그런 순간을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며 어린 공효와 함께 용기를 낸다.
사람은 스스로를 잘 알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달라지며 본인이 내린 선택의 이유도 각각이다. 마찬가지로 기억 또한 정확하기보다 자기 위주로 저장되기에 객관적이기도 어렵다.
그만큼 자기 객관화는 쉽지 않은 일이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내기도 힘들다. 아프고 힘들었던 순간을 참고 견디며 어떻게든 지나갈 거라 믿었던 어린 공효, 그 아이를 본 어른 공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의 삶에 지치고 아픈 이들에게는 이 순간을 건너갈 수 있다는 믿음이 되고, 기억 속 고통에 아픈 이들에게는 그 순간을 지금도 꿋꿋하게 건널 수 있다는 응원이 되리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자기를 만나는 환상적인 소설이지만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든, 자기를 둘러싼 상황에서든 우리는 스스로의 탓으로 돌릴 때가 있다.
자기에게 문제를 찾아서 그 상황을 접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 소설은 그때의 감정을 어루만지며 두려움과 상처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잘 보여준다.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순간이나 자기가 정말 싫었던 순간 때문에 아픈 이들에게, 그건 그때의 자신이 내렸던 하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니 아픈 만큼 스스로를 안아주라고 가르쳐 주는 소설 같다.
피하기보다 마주 서고 비난하기보다 감싸주며 지나치기보다 함께 가라는 걸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 아픔에, 그때의 우리 자신에, 따뜻한 악수를 내미는 소설이었다.
친구와의 관계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 타인의 말에 상처받아 아픈 사람들에게 잔잔한 위로와 응원을 주는 책이라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