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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툭, 말을 걸었다
이해일 지음 / 좋은땅 / 2025년 11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요즘은 음악도, 영화도, 책도 모두 클라우드 속에 있다. 기억이 아니라 '저장 용량'을 걱정하는 시대. 내가 직접 고르고 다듬던 취향의 흔적은 희미해지고, 이제는 알고리즘이 대신 내 마음을 예측한다.
그럴 때면 문득, 예전의 불편함이 그리워진다. 좋아하는 해외 가수의 음반을 찾아 서울의 거리들을 돌아다니며 느꼈던 그 설렘, 낡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비디오 가게의 진열대를 헤매던 시간. 그렇게 손끝으로 겪은 수고와 기다림이야말로,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아꼈다는 증표였던 시절이다.
pp.38~39
어쩌면 우리가 불편해하는 건 그 사람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성격이 괴팍해서가 아니라, 그가 놓인 역할과 상황 속에서 다른 면이 드러났기 때문일지도 몰라.
사람은 누구나 맡은 역할에 따라, 마주한 순간에 따라 다른 얼굴을 꺼내 보이니까.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본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자리에서 만났더라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조금 더 따뜻했을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p.47
친절하면 가볍게 여겨지고, 권위를 세우면 멀어지는 세상에서 위치가 올라갈수록 그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리더십이란 결국 관계를 다루는 일이었고, 그 관계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섬세했다.
p.67
나이가 든다는 건 감정의 강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다루는 법을 조금 더 익혀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니까'도 아니고 '어른이라서'도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나잇값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 것 같다.
p.123
젊음은 어느 순간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는 젊다고 믿지 않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인지도, 서른여섯의 오늘은, 지나가 버린 계절이 아니라 아직 내 곁에서 천천히 머무는 봄 같은 시간이었다.
p.143
내가 지금까지 '원인'이라고 여겨 온 것들이 사실은 결과를 향해 가는 하나의 경로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삶은 선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게 아니라, 결국 비슷한 지점을 향해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결과에 매달리기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길 위에서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살아가려 한다.
p.171
어쩌면 나는, 상대의 사정보다 내가 배운 방식에 더 익숙했고, 그 익숙함 안에서 '옳음'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도리는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 배려와 존중을 나누는 좋은 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도리가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각자의 처지와 맥락도 함께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203
이해일, <하루가 툭, 말을 걸었다> 中
+) 이 책은 일상, 사람 사이, 가족, 나이 듦, 사회생활 등과 관련된 저자의 단상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저자가 30대 때부터 꾸준히 기록해온 일기 형식의 글들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겪고 느끼는 체험과 감정을 저자는 에세이로 풀어내고 있다.
오래도록 함께 한 가구와의 추억, 선후배 혹은 친구와의 만남, 부모님 그리고 누나와의 기억, 직장인으로서의 경험, 하루와 일상 그리고 순간에 대한 단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철학 등을 감성적인 문장으로 적었다.
음악을 만들며 글을 쓴다는 저자는 글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을 선율에 담아 이 책에 QR 코드로 실어 두었다. 이는 눈과 귀로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독자를 배려한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에세이집이니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마음이 끌리는 부분부터 먼저 읽어도 괜찮다. 결국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저자가 어떤 사고와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함께 나누는 기분이 드는 글들이었다. 30대부터 써온 글이 10년을 넘겼다고 하니, 저자의 나이 대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고 그때의 감정에 공감한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자기만의 사연과 경험에 따라 어느 한 편의 글에 깊이 공감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하루와 한순간의 감정을 일기처럼 담아낸 책이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잔잔한 어조가 에세이집으로서의 역할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간혹 운문 형식의 글도 보이는데, 시든 산문이든 저자의 마음을 진솔하게 엮은 책이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