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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 환영의 집
유재영 지음 / 반타 / 2025년 11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실비가 혈액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세상은 본래 가장 취약한 이를 겨냥해 더욱 잔혹해진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려는 순간에도, 거리나 병원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거나 사체를 보거나 누군가 소리 내어 우는 소리만 들려도 숨이 막혔다. 어디에든 대고 작작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 까마득했다.
p.33
한집에 사는 일은 훨씬 더 파편화된 일로 구성되어 있어 섬세한 조절과 균형이 필요했다. 이미 규호와 함께 한 많은 시간들이 금이 가고 뒤틀린 채 고여 있었다. 그 어긋난 시간이야말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였다.
p.72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이니 다음 날이 귀신날이었다.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성에서 그날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엄마도 귀신날에 대해 이야기한 건 두 번뿐이었다.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마당에서 잡풀과 잔가지를 불태우고 신발을 모두 장에 집어넣었다. 귀신들을 쫓으려는 게 아니라, 집을 찾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로 와도 괜찮다는, 환영의 의미였다.
p.133
고타로가 있는 세계는 죽음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곳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어떻게 인간은 죽는가. 매일 전쟁터에서 수천 명이 죽어갔다. 고타로는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썼지만, 이제 그 말은 다르게 들렸다.
p.136
나오의 기록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의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재하는 것일까.
pp.159~160
유재영, <호스트> 中
+) 이 소설은 한국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전개된다.
적산가옥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일본인이 건축해 일본식으로 지은 일본인 소유의 주택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매각한 집을 의미한다.
청림호 옆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1945년, 1995년, 2025년에 각각의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역순행적 구성으로 시간을 뒤섞으며 벌어진다.
2025년 현재의 시점에서 규호네 가족은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오고, 처음부터 적산가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규호'와 달리 아내 '수현'과 두 아이 '실비', '실리'는 이곳을 마음에 들어한다.
투병 중인 딸의 병원비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큰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이 집으로 이사를 오지만, 이곳에서 규호는 내내 불안해한다.
그리고 실재하는 현상인지, 꿈속 같은 환영인지 알 수 없는 소리와 흔적, 존재들을 가족들이 보고 느낄수록 그 불안감은 증폭된다. 적산가옥과 관련된 규호의 숨겨진 사연은 무엇일까.
반면에 수현은 아픈 딸의 건강과 현재 가정 형편에 이 집이 큰 도움과 위안이 되기에 비현실적인 현상과 환영을 느끼면서도 머물고자 한다.
또 그때쯤 일본어로 실험 이야기가 기록된 글과 낡은 편지를 발견한다. 일본어를 천천히 분석하며 이 글들이 80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나오'의 것임을 알게 된다.
나오는 조선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의사였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림 병원에서 근무하며, 이 집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잃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기 무렵 그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일은 2025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선택의 하나로 이어진다.
이 소설을 호러 소설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아깝다. 오히려 스릴러 소설에 가깝고 문학적 깊이도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장르를 경계 짓기에는 폭넓은 성향을 지닌 소설이다.
그렇기에 각각의 갈래로 생각해 보자면, 스릴러 소설이 갖고 있는 특유의 긴장감,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몰입감을 잘 형성한 소설이다.
또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진실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핍박과 억압, 그 기회를 틈 타 조선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일본 내지인, 하지만 해방 직후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증오 등을 담백한 문장으로 냉철하게 그려냈다.
각각의 사건이 결말로 향할수록 호러와 미스터리 소설에 가까운 모습도 보인다. 시간적 배경이 확연히 다른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고, 시대를 뒤섞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도 작품의 흡입력을 높이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사연을 지닌 여러 인물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순간순간 마음이 아팠고, 또 그들의 고통에 함께 분노했으며, 그들의 두려움에 같이 무서워했던 소설이었다.
결말을 미리 언급하면 안 되는 영화를 보듯 쉼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다 읽고도 앞의 그 장면이 환영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읽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영일까. 그런 궁금증에 대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