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신앙의 상실은 특별한 깨달음을 주지도 않았거니와 끔찍하게 괴롭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난 체념은 내가 살아가며 겪은 일들로 더욱 공고해졌으며, 결국 신과의 대화는 무조건 일방통행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 죽음과 잇따라 처음 그 자리에 다시 태어난 재탄생이라는 논쟁은 결국 기운 빠지는 필연으로 종결지어졌고, 이제 나는 끝내 실패한 실험을 지켜보는 과학자처럼 극심한 낙담과 초탈에 빠져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
p.35
난 보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현판에는 '성마고 정신병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누군가 '불행한 이들을 위한'을 박박 지워버렸는지 보기 흉한 빈자리만 남아 있었다. 내가 두 번째 생애에서 일곱 살의 나이에 창밖으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 병원이었다.
p.41
"이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오거스트 박사님? 당신은 죽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세계가 리셋된다 이거죠, 쾅! 하고."
"우리같이 하찮은 삶을 사는 하찮은 사람들은 다 죽고 없어지고 이 모든 게......"
p.95
복잡성을 이유로 어떤 개입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크로노스 클럽의 만트라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말을 전한다. 이건 고결하지도 대담하지도 정의롭지도 야심만만하지도 않은 만트라지만,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에, 감히 시간 그 자체에 손을 대려는 시도를 경계하려는 일이니, 이 신성한 맹약은 반드시 모든 크로노스 클럽 본부의 문 앞에 걸려 있어야만 한다.
p.112
공포는 재탄생에 있다. 재탄생, 그리고 몸이 아무리 갱생해도 정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p.140
"나는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우리는 이 모든 걸 알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우리가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 아니야. 우리한테 해결책이 있다는 얘기도 아니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는 해야 해."
pp.267~268
당신은 신입니까, 오거스트 박사님? 당신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생명체입니까? 기억한다고 해서, 당신의 고통이 더 크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이 모든 걸 경험했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p.345
"바보구나. 뭐가 옳은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p.431
클레어 노스,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中
+) 이 소설은 66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이다. 정확히는 과거를 기억한 채 끝없이 반복되는 생에 관한 SF 스릴러 소설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매번 같은 해에 태어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세 네 살 무렵부터 본인의 지난 과거를 기억하는 남자, 그가 바로 '해리 오거스트'이다.
처음 한두 번 비슷한 생은 신경 쓰지 않다가 계속해서 자기 인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여러 방안을 생각해낸다.
다양한 종교에서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에게 일어나는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에 그걸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에 그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립된다.
그렇게 그는 되풀이되는 인생의 틀에서 지루함과 외로움에 지쳐만 간다. 그럴 때 그에게 다가오는 세력들이 있다.
미래를 알고 있다면 본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무리들. 그들은 해리 오거스트를 설득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그를 압박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과거와 지속되는 현재에서 그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인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며 흔들린다.
그는 다시 태어날 때마다 많은 언어와 문화, 사회적 지식을 배우고 쌓는다. 그의 환상적인 경험은 수많은 위협과 비웃음, 그리고 의심 속에서 그렇게 천천히 방향을 찾아간다.
열다섯 번째의 삶이라는 제목에서도 나오듯 이 소설에는 그의 반복되는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중요한 건 그 반복이 일정한 틀일 뿐 그 안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기 존재 가치를 찾아, 어떤 방식이든 시도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포기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런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이지만 스릴러 갈래이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사회 역사적 배경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과거를 아는 힘이 미래를 바꾸는 힘이 될지 모른다는 걸 소설을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 이게 과연 득일지 해일지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해리 오거스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소설이었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삶은 편하지 않다. 너무 특이한 삶도 편할 수 없다. 이 소설은 그런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를 위하는 일을 하는 것, 역사를 바꾸는 기회를 갖는 것.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해리 오거스트의 입장과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입장, 모두에 각각 서 있어보았다.
입장과 상황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쪽에서도 내적 갈등과 두려움이 동반되리라 생각한다. 긴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게 쉼 없이 읽은 책이었다.
지적인 스릴러라는 어느 소설가의 평에 깊이 공감한다. 사회 문화적, 역사적 상황들을 어렵지 않게 살핀 기분이 든다. 참신한 발상의 지적 스릴러를 접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