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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평점 :
어느 순간부터 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취향에 맞게 옷을 입었고, 머리를 바꾸었다. 내 삶의 모든 게 정현에게 맞춰져 갔다. 그래도 당시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마취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는 스스로의 변화에 무뎌졌다. 누구에게 뭐라고 하소연할 수도, 정현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그가 한 건 강요도, 협박도 아닌 한마디 말일뿐. 전부 내 선택이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늘 목의 이물감에 시달렸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잊고 있다가 침을 삼킬 때면 한두 번씩 따끔 하는 정도였다.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 말하기조차 민망하지만 확실히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겐 느껴지는 것. 그런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9% [초대]
주연은 자신에게 가족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아빠를 사랑했나?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함부로 대하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이야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그가 꼴보기 싫었던 적도 많았다. 사실 싫은 기억이 더 많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52~53% [칵테일, 러브, 좀비]
사실 언제든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일 수 있었고 언제든지 나도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다. 매번 차마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과도로, 어머니를 죽인 과도로 내 안의 '차마'를 끊어 버렸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의 목을 잘랐다. 사실 이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동안 그가 우리에게 베푼 폭력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아직 한참이나 공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란 것이 원래 불공평한 것 아닌가.
66%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조예은, <칵테일, 러브, 좀비> 中
+) 이 소설집은 호러 소설, 판타지 소설, 스릴러 소설 등의 다양한 주제에 올라있는 책이다. 그만큼 이 소설집을 읽으면 살짝 충격을 받는다. 괴기스러운 장면이 등장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그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왜 저럴까. 나라면 어떨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한 느낌으로 사는 여자에게 서슴없이 자기 취향을 강요하며 여자를 변모시키는 남자, 목의 이물감처럼 좀 불편했으나 사소했기에 그의 의견을 수용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본모습을 잃은 여자.
갑자기 숲에 나타난 귀신을 보고 놀라며 궁금해하다가 그리워하는 물귀신, 자기도 귀신이 분명한데 숲귀신의 존재가 무서우면서 반가운 신기한 존재.
뱀술을 잘못 먹고 좀비가 된 아빠, 웬수라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좀비 남편을 어쩌지 못하는 엄마, 그런 엄마와 좀비 아빠를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감싸안으려는 여자.
엄마를 때리다가 가끔 자기도 때리는 아빠를 죽이고 싶었던 남자, 아빠가 엄마를 죽이기 전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고 싶었던 아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계속 같은 결과가 지속되는 무력한 상황 속 남자.
이런 캐릭터들이 이 소설집에는 등장한다. 데이트 폭력, 환경오염, 동물 학대, 국가의 방관, 가정 폭력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물들은 매번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라면 어떨까.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하는데 처음에는 낯선 느낌에 멍했다가, 다시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소설 구성이 공모전 취지에 맞게 추리물로서 적합했고 영화 같은 서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네 편의 스토리가 뚜렷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좀 불편했는데, 다 읽고 다시 훑어보니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있는 듯 없는 듯 써 내려간 문장들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호러물이나 괴기스러운 상황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재미있는 작품집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