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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이의 축복 코리아둘레길 : 입문편 - 민달팽이 리듬으로 걷다
이화규 지음, 이세원 사진 / 나무발전소 / 2025년 4월
평점 :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걷기란 나의 호흡과 마주하는 일이다. 깊고 안정적으로 내쉬는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걷는 동안엔 활자를 만나지 않는다. 활자의 부재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걷는 동안엔 어떠한 소식도 받지 않는다. 뉴스의 부재 역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걷다 보면 걸음 그 자체가 외부로부터 멀어지게끔 한다.
pp.15~16
바람이 분다. 난 나와 자연 대상 사이의 거리에 무엇이 끼어드는 것이 싫다. 감각이 가로막히는 게 싫다. 그래서 옷도 최대한 가볍게 입고 배낭도 최대한 가볍게 꾸린다. 선글라스 없이 맨눈으로 보고, 귀를 덮지 않고 맨 귀로 듣는다. 음악을 듣거나 스트리밍을 듣는 일은 없다. 선크림도 안 바른다. 가끔씩 멈춰 서서 계절의 냄새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 땅의 냄새를 맡고, 샘물을 맛본다.
p.27
그럼에도 길어서 걷는 동안 벌어지는 모든 경우가 집의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훌륭하다.
p.42
날은 차갑고 캄캄하고 쓸쓸도 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는다.
내 생각은 무너지는 옛날을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아보지만
강풍 속에서 젊은 시절의 희망은 우수수 떨어지고
나날은 어둡고 쓸쓸도 하다.
입을 다물어라, 슬픈 마음들이여!
절망일랑 말지어다.
태양은 아직 비치고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롱펠로우, <비 오는 날>
pp. 133~134
한 지인이 "왜 그대는 한사코 그렇게 걷는가?" 하고 물었다. 내 대답은 이러하다. "어디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있겠는가. 걷기란 내게 삶의 상처를 잊고, 창의적이고 입체적인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멈춰 있으면 생각이 죽고 삶의 상처만 도드라진다. 걸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
p.261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p. 270
이화규, <걷는 이의 축복 코리아 둘레길 - 입문편> 中
+) 이 책은 저자가 우리나라 둘레길 전 구간을 걸은 경험을 단상 형식의 글과 사진으로 풀어낸 산문집이다. 인문학자인 저자가 문학 작품, 음악 작품들을 사진 및 동영상과 함께 언급하고 있기에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남파랑길과 서해랑길에 그리고 DMZ 평화의길을 완보했다. 더불어 제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서울둘레길, 경기둘레길 등도 걸었다.
이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별로 맨 앞에 여행 전반을 요약하는 둘레길 지도를 실어두었다. 하지만 저자는 애초부터 이 책을 둘레길 코스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그것보다는 둘레길을 걸으며 스스로와 만나는 몰입의 순간, 사색의 순간,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 자연 생태를 관찰하는 순간 등으로 엮어냈다.
사진은 물론 QR코드를 통해 여러 음악과 동영상도 볼 수 있다. 걷는 그 순간의 생생함을 독자와 공유하려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걷는 것의 가치에 대해 꾸준히 언급하며 그 시간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이 그 소중한 시간을 느끼길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잘 전달된 책이었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근교의 둘레길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면 어떨까 상상했다. 우리나라에 둘레길이 이렇게 잘 조성되어 있는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둘레길이 표시된 지도를 보며, 천천히 꾸준히 걷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저자가 왜 '걷는 이의 축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저자를 따라 천천히 걷는 스스로를 만날 수 있었다. 잔잔하지만 생생한 풍경 사진을 보며 적어도 둘레길 한 코스를 직접 걸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