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리커버 개정판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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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올해는 감자 수확이 좋지 않지만

라당의 여인들은 우울해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밭을 오르내리면서도

소녀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대화한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죠.

풍년에는 베풀 수 있어 좋고

흉년에는 기댈 수 있어 좋고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고 웃음을 짓는 거죠."

p.19 [라당의 여인들]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p.21 [마당에 모여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야 어디서나 흐뭇하지만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특별히 감동이다.

이 땅은 네덜란드와 일본의 350년 식민지 나라,

그들은 저항운동의 싹부터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독립저항의 주체인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전략이다.

p.61 [벌거숭이 아이들]

손수 지은 흙집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부부는

"나라와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는 없지요.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음'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찌할 수 있음'은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p.89 [구름이 머무는 마을]

하루 일을 마친 여인이 계곡물로 몸을 씻는다.

"오늘 종일 세 걸음의 밭을 개척했지요.

밖에서 자연과 대지를 존중하며 일했으니

이제는 집에 돌아와 제가 존중받는 시간이지요."

그녀가 차려주는 옥수수 나물밥을 먹으며

한 뼘의 농지도 늘려본 적 없는 나는, 그녀 앞에

자꾸만 미안하고 고맙고 부끄러워 목이 메인다.

p.171 [노을빛에 몸을 씻고]

흙먼지 묻은 흰 옷의 사내들이 강물을 만나자

발길을 멈추고 땀을 씻고 빨래를 한다.

"디레 디레 잘 레 만느."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부디 서두르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아라.

모든 것은 인연의 때가 되면 이루어져 갈 것이니.

p.247 [디레 디레 잘 레 만느]

"카슈미르에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p.295 [천 그루의 나무를 심은 사람]

박노해, <다른 길> 中

+) 이 책은 시인인 저자가 티베트, 파키스탄, 버마, 인도네시아, 라오스, 인디아를 방문해 소박한 서민들의 선량한 모습들을 사진과 글로 담아낸 사진 에세이집이다.

10년 만에 다시 재출간한 책자이나 여전히 그들의 삶과 사유가 글자와 사진으로 생생하게 남아 전달된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만의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 같아 뭉클했다.

그들이 간직한 희망은 그들이 올곧게 믿고 있는 믿음의 씨앗으로 연결된다. 그 믿음과 희망이 읽는 이에게 정직하고 일관되게 와닿기에 함께 응원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사진 대부분이 흑백인데 그게 오히려 저자의 문장과 나란히 설 수 있게 하는 특징이지 않나 싶다. 색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흑백의 미 그대로를 저자의 진솔한 문장과 엮고 있기에 집중할 수 있다.

저자의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단단하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겠다. 사진 속 이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할 때면 단단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서도 담백하게 표현한다.

어떨 땐 감정이 몰아치듯 문장으로 풀어내지만 그조차 되도록 간결하게 써낸다. 저자만의 문장 스타일이라 판단한다.

이번에는 사진과 문장을 두루 살펴보며 읽었지만,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사진만 몰아서, 글만 몰아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다.

역경 속에서도 절망에 빠져있기보다 되도록 희망을 생각하고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어느 때고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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