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작점의 시작
치카노 아이 지음, 박재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4년 8월
평점 :
종이학을 접던 밤, 나는 나름대로 성매매에 대해 타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맴돌았고, 가끔씩 불쑥 솟아올랐다.
하지만 막상 생각하려고 하자 내가 마음에 그렸던 성매매의 이미지는 제삼자들의 말뿐이었고, 정작 가장 중요한 엄마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였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현역으로 일할 수 없었을 거야."
p.51
이곳은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 이런 불안정한 장소에는 서 있을 수 없다. 언제 신분이 노출될지 모르는 그런 공포에 떨며 사느니 차라리 이 환경을, 모든 관계를 통째로 끊어버리는 편이 낫다. 과거도 미래도 묻지 않는 '지금'만이 있는 밤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어울리는 편이 더 편하다.
p.88
우리는 타인이다. 과거도 미래도 공유하지 않는, 오직 '지금'만 존재하는 관계다. 그가 나에게 한 이야기나 내가 그에게 한 이야기도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익명의 관계이기에, 원하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관계이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닐까?
p.107
"난 그냥... 나 같은 사람 옆에 있고 싶었을 뿐이야."
"후우카 같은 사람이라니?"
"모든 사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불안한 사람."
p.160
"선생님은 왜 교사가 됐어요?"
"어? 으음... 정상적인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정상적인 어른은 어떤 사람인데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니까,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직업을 목표로 한 거야."
p.177
"나츠키는 말이야, 비뚤어졌지만 착실한 방향으로 비뚤어졌구나."
"비뚤어지는 데도 방향성이 있나요?"
"있지. 솔직히 말하면, 이상하게 겉바른 척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것 같아. 그런 게 좋아."
p.244
"말하자면... 감독도 결국 우리를 얕본 거야. 도와줘야 하는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사회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불쌍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잘난 자식아, 고맙다! 너무 훌륭해서 눈물이 다 난다!"
p.276
치카노 아이, <시작점의 시작> 中
+) 이 책은 일본에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소설로, 성매매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집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은 마치 연작소설처럼 이어져 있어 작품마다 인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어 흥미롭다.
성매매 여성으로 살며 아들을 키우다가 결혼을 하려는 싱글맘, 성매매 여성의 삶을 거쳐 교사로 근무하다 그만둔 여성, 여행 자금 마련을 위해 성매매를 시도하는 여대생,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걸 말한 뒤 갈등하는 싱글맘, 성병 예방 정보나 접대부 여성을 위한 콘텐츠로 유튜브를 하는 여성 등등
하지만 이 소설에는 여성들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이들 즉, 그들의 가족, 그들의 손님, 그들의 연인,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성매매 여성을 향한 타인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잘 담아내고 있다.
나 혹은 내 주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먼 관계에서 이들을 바라볼 때와, 나 혹은 내 주변인의 이야기로 이들을 겪어야 할 때는 생각보다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이 소설은 그 양쪽의 관계를 섬세하게 풀어냈다.
파격적인 소재를 새롭고 다양한 시각으로 그려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자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 성매매 여성과 가족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모습에서, 나라면 어떨까 어떤 생각으로 그들을 바라볼까 고민한 시간을 준 소설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