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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ㅣ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그들은 지금쯤 어디 앉아 쉬고 있을까. 거기선 어떤 바람이 불고 어떤 비가 내릴까. 어떤 돌멩이들이 그들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을까. 얼마나 오래된 돌멩이들이 그곳의 비, 바람, 별빛 달빛을 품고 앉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을까.
돌멩이는 미움이 없고 슬픔이 없고 서러움이 없다.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만 있는 곳. 부는 바람은 가볍고 내리는 비는 미지근하다. 잠시, 모든 것이 괜찮다. 한 번쯤 잠시, 그런 곳을 떠올려본다. 안전한 곳에 마음을 두기.
p.41
다 큰 어른이지만 먼 기억 속 이야기에도 속상할 때가 있고 괜히 울적할 수도 있다고, 다 그럴 수가 있는 거라고, 내 마음에게 쉬지 않고 들려주고 싶다.
망가질까봐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가뜨리고, 무엇을 수선하고, 무엇을 다시 세우고, 무엇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알 것 같기 때문이다.
p.75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단 하나의 답을 떠올렸다.
ㅡ 저에게는...... 개가 있어요.
개는 나에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먹어봐. 이렇게 잠들어봐. 이렇게 기뻐해. 이렇게 기다려봐. 이렇게 사랑을 해봐.' 보여주면서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는 기뻐하는 마음도 아낌없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그러니 때때로 개가 나를 바라볼 때, 그러니까 '나는 개야'라고 말하는 그 눈빛에서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 여기 내가 있어'라고 말하는 눈동자에 비친 '여기의 나'를 보면서. 개의 눈동자가 '지금, 여기 있음'을 보여줄 때 개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삶을 사랑하게 만든다. 삶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내게 친절한지 이야기한다.
pp.145~146
시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걸 끝없이 알려준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다만, 알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쓰는 일, 새로운 공간을 짓는 일, 그러니까 시 쓰기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시를 읽고 쓸 때 나의 세계가 한겹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pp.162~163
최지은, <우리의 여름에게> 中
+) 이 시는 시인인 저자의 첫 에세이집이다. 이 책의 첫 글을 읽고 나면 이 책이 어떤 무게감과 빛깔을 담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접하노라면 처음에는 한없이 묵직해지다가 이내 멈추게 된다. 그건 가라앉는다는 표현보다 멈추어 선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돌멩이에게는 미움이 없고 슬픔이 없고 서러움이 없다'는 저자의 말이 지금 그의 세계에서 이 글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저자가 어렸을 때 겪은 많은 일들과 그에 대한 감정들, 그게 슬픔인지 서러움인지 울적함인지 명확하지 않았던 그때에 저자는 가라앉는지도 모른 채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들이 존재하며, 자신을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개가 존재한다. 그들 덕분에 저자의 아픈 기억들은 어느새 슬픈 추억이 되다가 그래도 반가웠던 기억이 떠오르는 추억으로 남는 게 아닐까 싶다.
솔직한 저자의 말들에 너무 솔직한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다가 그게 저자가 지금을 사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자의 여름은 이제 상처로 아프거나 당황스러웠던 기억보다, 어려웠어도 뽀드득거리는 오이지 하나로 맛있게 밥을 말아먹을 수 있던 기억이 조금 더 떠오르는 게 아닐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책 표지가 글의 내용과 좀 동떨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며칠을 생각하다가 책 표지를 보았을 때, 어쩌면 이게 지금의 저자에게 존재하는 여름이지 않을까 싶었다.
시인인 저자의 문장들을 접하며 이 작가의 시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느낌일까. 그 시는 어떤 색감을 지니고 있을까.
처음에는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본의 아니게 훔쳐본 기분같아 좀 어색했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나자 이건 저자가 스스로에게 혹은 비슷한 여름을 보내는 누군가를 위해 남긴 이름없는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아버지, 개, 자기 자신, 그리고 사랑과 시에 대한 기억과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엮어낸 에세이집이었다고 생각한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가 단정하면서도 알차다는 생각을 하며 저자만의 세계를 함께 걸은 기분이 든 책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