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
구소은 지음 / 봄의영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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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은 꿈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거운 것이 싫었다. 꿈은 무거웠다. 서른세 해 동안 꿈을 가진 사람은 많이 봤지만, 꿈을 이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왠지 꿈이라는 것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없애기도 곤란한 약속 같았다. 없애지도 바꾸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깨어지는 걸 바라봐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먼 훗날 거울 앞에 섰을 때, 실망과 좌절이라는 가시투성이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그녀 자신을 본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까. 그래서 언제라도 수정할 수 있는 희망 사항이라는 단어가 편했다.

p.131

사람의 삶에서 우연을 빼면 뭐가 남을까. 삶이 지속되기나 할까.

운명은 우연의 모습으로 온다. 그렇다고 우연이 다 운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우연과 운명 사이에 놓인 것이 있다. 바로 인연이다. 정작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바로 이 인연이다. 대상과 폭과 길이와 깊이만 다를 뿐이다.

p.260

잊지는 않았어도 기억되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기억하되 추억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관계도 있다.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때는 서로 증오하거나 하나가 떠난 뒤일 확률이 높다. 은설과 연지가 그랬다.

pp.313~314

세상에 그냥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상욱이 두 번씩이나 그냥이라고 했다. 그는 그냥에도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종종 하는 말 중에는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것도 있었다. 그 말은 그가 맞는 것 같았다.

자고 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즐거운 꿈이라도 꾸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상욱의 말을 들으며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p.349

구소은, <종이비행기> 中

+) 이 소설은 영화와 소설이 나란히 수록되어 영화로 재연된 내용이 소설 속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추적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극 중 극 형식의 액자식 구성임이 분명하나, 소설 내 영화 시나리오가 내부극이라고 하기에는 외부극과의 관련성이 상당히 높은 작품이었다.

이 책은 작품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더 흥미로워진다.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들의 사연과,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게 되는지의 모습, 그리고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의 상관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몰입도를 높인다.

작가 개인의 정신병원 입원기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장면 장면이 그려진다. 오히려 시나리오보다 소설을 통해 그 장면들이 떠올라 작품 속 시나리오의 기능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목숨을 건 친구의 고백을 이용한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이 책에서도 시나리오 창작을 위해 다른 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이가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어쩌면 그가 내린 모든 선택은 죄다 자기 작품을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책을 덮으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반전 속 숨겨진 반전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수록 소름 돋게 만든 소설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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