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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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 잘혔어. 그려 그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잘 물어물어 가면은 다아 잘 되니께."

p.12

"평아, 오늘 애썼는데 서운했냐아. 근디 말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지야.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거란다.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두는 거제.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께."

p.16

할머니는 등을 다독여 주고는 또 내 손을 잡고 장터를 자박자박 걸어감시롱 이 사람 저사람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동냥치들에게까지 동전을 챙겨주면서 안부를 물었다.

그런 우리 할머니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꼿꼿이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머슴도 아니고 백정도 아니고 반편이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내 머리를 만지며 아는 체 인사를 건네면 할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는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개한(참되지 아니한) 사람이다. 저이가 일제 때도 이승만 때도 완장 차고 설친 자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시 또 지금 시국에도... 아가 너는 개한 자들 멀리하고 참한 이들 만나서 참말만 하고 참사람으로 살아야 쓴다이."

"저이는 얼간이다. 시류 따라 요리조리 쏠려감시롱, 줏대도 배알도 지조도 없어야. 얼 나간 이는 나쁜 영이 들어서 그이를 숭악한 길로 가게 해불제."

pp.22~23

"아부지는 돌아가셔 부렀어라."

"어허이. 쯧쯧. 한이네. 한이 크네. 그래도 장허네. 기운이 맑고 마음에 빛이 있으니께. 내 눈은 멀었으나 다 보고 느끼는 것이 있제. 사람의 마음씨는 못 속이는 법이네. 어쩌겄는가. 고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인디. 자네도 우리 숙이도... 힘든 거 아픈 거 쓰린 거 다 영약이니께 고생을 달게 달게 삼켜내야제. 원한은 말이시, 참말로 중헌 것이네. 원은 보듬고 풀어서 해원해야 하나, 한은 깊이 고이 품어가야 하는 것이제. 한에서 정도 나고 눈물도 나고 힘도 나오는 게 아니겄는가."

p.109

"오늘은 니가 이겨라! 내일은 우리 것이다!"

분하고 서러운 마음에 앞으로의 날들은 우리가 이길 거라고, 그날 우리는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동무를 위해 나서 주고 '아닌 건 아닌디요.' 말하고 동무랑 같이 울어주던 그날, 우리는 이미 옳았다. 그날, 우리는 이미 이겼다.

pp.138~139

"사람은 영물이다. 니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사람들은 다 알게 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물이 되지 말그라."

p.153

박노해, <눈물꽃 소년 ㅡ 내 어린 날의 이야기> 中

+) 이 책은 작가가 직접 추억한 어린 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 수필집이다. 저자가 시인 박노해로 성장하기까지 발판이 되어준 어린 날의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사연을 담고 있다.

저자는 그 시절 '평'이란 이름으로 집안일을 도우며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 세대에게 익숙한 초등학교가 그 시절에는 국민학교였다. 청소년이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이른 듯한데,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왜 그가 불의한 것에 저항하는 시인 박노해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마냥 어리기만 할 것 같은 국민학생인데도 그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표현했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으며, 소외되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친구였다. 그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수필에서 그의 할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가, 그의 형과 누나가 얼마나 올곧게 그를 이끌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전라도의 찰진 사투리가 생생하게 다가오기에 수필집을 꼭 한 편의 동화, 한 편의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단순히 재미만 있는 책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수없이 뭉클하며 감동했고, 이런 훌륭한 어른들이 계셨다는 것에 감사했고, 그의 문장들에서 묻어나는 그분들의 속 깊은 정과 단호한 의지, 따뜻한 배려심에 새삼 어린아이로 돌아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깨달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이들이 옳은 길로 가려면 이런 훌륭한 어른들을 더 많이 만나야 한다고. 어려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손을 먼저 내밀고, 부당한 것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동무를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는 어른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고.

책을 읽는 내내 잠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의 동무가 되어 그의 집에 놀러 가 어른들도 뵙고 그 올곧고 따뜻한 마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또 이런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결심도 했다. 이렇게 훌륭한 어른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더 따뜻하고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좋은 사람, 훌륭한 어른, 올곧은 인간이 되고 싶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어른들에게도, 청소년들에게도 모두 권해주고 싶다. 전라도 사투리의 구수함이 미소 짓게 만들고 순간순간 감동을 전해주는 내용이 많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지금의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사람, 훌륭한 어른을 꿈꾸도록 돕는 책이라고 느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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