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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오천 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꼭 이르케 삯을 받아야 일을 허지, 넘이냐, 넘?"
내게 오천 원을 쥐여주며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눈을 흘기면서도 표정이 환했다.
2%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빙신.'
요새 할머니의 푸념은 늘 이 말로 시작되었다. 할머니에게 이름 석 자를 먼저 읽고 쓰게 하는 것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아무리 서운하다고, 이름을 그렇게 서운하게 지을 일이냐."
할머니는 자기 이름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할머니 황서운이 아니라 황서은이에요, 은."
"참말?"
"서운허다는 것이 아니믄, 뭔 뜻인디야?"
"상서로울 서, 은혜 은."
"아주 특별한 복을 받는 아이."
"오메, 시상에....."
23~24%
아가씨가 말한 간판이 딱 보이는 일은 어떤 약속이 지켜지는 기분이었을까. 아무튼 할머니는 틀림없이 지켜지는 어떤 약속의 세계에 새로 데뷔한 시민 같았다. 할머니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할머니가 상쾌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부런 사람이 없다."
36%
학습지의 친절한 질문에, 할머니도 다소곳이 대답해놓았다.
ㅡ 오늘은 기분이 어떤가요.
조치요.
ㅡ그런 기분을 느낀 이유를 써 보아요.
봄빠라미 부니깨요.
53%
'알어야 면장이라도 혀' 할머니가 습관처럼 뱉던 이 말을 떠올렸다. 알아야 면장이 담장을 면하는 거였구나. 알면 눈앞의 벽이 없어지는 것. 나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르르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했다.
95%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97%
권여름, <작은 빛을 따라서> 中
+) 이 책은 '필성 슈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날이 발전하는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와 아빠, 그 옆에서 어떤 도움이든 되고 싶어서 애를 쓰는 할머니, 그리고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연기 학원에 다니고 싶어서 용돈을 모으는 오은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사는 크게 두 줄기로 나뉘는데, 은동이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동이는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면서 용돈을 모은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친구와의 비교 등을 통해 은동이가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인 필성 슈퍼가 대형 마트를 상대로 어떻게 끈질기게 버텨내는지의 모습도 싣고 있다. 작가는 소시민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생애를 꿋꿋하게 꾸려가는 모습을 안타깝지만 흥미롭게, 씁쓸하지만 재미있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은동이와 할머니의 케미를 보며 순간순간 웃을 수 있다. 글자를 깨치면서 기뻐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오히려 성장 소설의 느낌을 받는다랄까. 글자를 알수록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할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아 같이 행복했고 감동적이었다.
이들 가족이 각자의 고민과 어려움 틈에서도 견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응원하며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집이 자꾸 떠올랐다.
소재가 비슷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소시민과 현대의 소시민이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씁쓸하지만 그게 반복되는 현실이기에, 그 속에서 견디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생생하게 담아낸 이 소설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
진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며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고 흐뭇하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은동이의 앞날과 할머니의 용기와 필성 슈퍼 가족의 끈기를 함께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에 살짝 부제를 달고 싶다. '봄빠라미 부니깨요'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