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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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게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삶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먹게 될 것이며 결국 나가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1%

소설이 이미 길의 지도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이들이 숨어서 읽고 쓰는 것이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 틀어박혀 있는 나란 인간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책을 어쨌든 읽고 있고, 읽은 뒤에는 쓸 것이며, 그렇게 쓰고 나면 어떤 성장이 가능할 테니까.

6%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리 놀라운 상상과 설정과 허구 뒤에 숨는다 해도 결국 자기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내면을 스스로 인화하는 과정이고 타인과 기꺼이 공유하는 것이다.

45%

용서해주는 것, 서툴렀던 어제의 나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우리는 그런 어제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누군가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건 우리의 체온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내려간, 하지만 완전히 얼지는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힘들다면 잠시 시선을 비껴서 서로를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되돌릴 수가 있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라고.

49%

어제는 눈이 온다고 하더니 비가 내렸다. 사실 오후에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는 눈이 오지 않기를, 무언가가 낙하 - 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비이기를 바랐다. 눈은 비보다 더 부피를 가져서 도시를 채울 때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흩날린다. 눈이 도시를 채우고 채우는데 왜 마음은 흩날릴까. 그것이 강하게 도시를 덮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만드는 동안 도리어 내 마음이 풀풀 흩어진다는 건, 그렇게 어떤 부피를 상실해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54%

어떤 불행은 나를 비켜 가리라는 기대보다는 내게도 예외란 없으리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위로받는다.

98%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 中

+) 이 책은 소설가인 저자가 작가가 된 뒤 약 10년간 써온 산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한 편 한 편 정성스럽게 풀어낸 글이니만큼 녹아있는 내용들이 마음을 울린다. 공감하기도 하면서 저자의 용기 있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하면서 정성스럽게 한 권을 읽었다.

이 책에는 작가의 유년 시절 이야기, 엄마와 할머니에 관한 추억, 그리고 글을 쓰려고 애쓰던 순간들, 소설가로서 강단에 섰을 때의 심정,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접적인 고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들에 대한 용기 있는 의견과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와 응원 등을 실려 있다.

언젠가 이 소설가의 책 댓글에 '김금희 씨의 소설은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에 깊이 공감하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댓글을 써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김금희 씨의 소설도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댓글을 다시 써보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김금희 씨의 소설이나 산문도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요.'

이 작가는 문장이 알차고 깔끔한 사람이다. 이런 표현이 옳을까 잘 모르겠지만 짤막한 산문에도 서사가 잘 구성되어 있고, 시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며 군더더기 없는 서술이 프로답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 직언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수성의 문체를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저자의 탄탄한 작품만큼 그녀의 올곧은 주관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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