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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
고혜원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평점 :
항상 저만 정의를 따르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였다. 굳이 대놓고 표현하지 않아도 '인간적으로 행동하세요.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는 말이 자연스레 들려오는 것 같아 듣기 거북했다. 최대희 소령에게 전쟁에서 옳은 선택은 승리뿐이고, 그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 맞았다. 그에겐 그것이 바로 지휘관의 소명이었다.
p.21
래빗의 삶은 늘 의심받는 삶이었다. 그렇지만 대체 왜 내가 의심받게 된 거지. 한 번도 실수는 없었는데.
"...... 이유가 뭔데?"
"...... 네가 매번 살아 돌아왔잖아."
p.46
"소위님, 전쟁 중이잖아요. 죽거나 사는 건 운에 달렸어요. 만주에서 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그냥 그날 운이 나빴던 거거든요. 제가 어떻게 구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못 지킬 것 같으면, 지키려고 애쓰지 마세요. 다 운명이구나 하세요. 알겠죠?"
"버려도 된다는 게 아니라, 살아남으라는 뜻이에요. 나 때문에 희생하지 말라고요. 나도 희생 안 할 거거든요. 나는 목숨이 위험하면 소위님 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해요.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pp.58~59
"그들의 희생으로 전쟁이 승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
"다 살아야죠! 그게 진정한 승리 아닙니까?"
"다 살아? 그게 전쟁터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p.94
"몸에 힘을 빼야지. 안고 있는 네가 불안해하면 어떡해. 이 작은 아이도 느껴. 불안하다는 걸. 그리고 원래 누구든 잘 안아주면 울음을 그치는 거야. 나이가 많든 적든 기댈 품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거든."
pp.170~171
고혜원, <래빗> 中
+) 이 책의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래빗'이라고 불리던 소녀 첩보원들이 있었다.' 그 문장을 보면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로 단숨에 소화할 수 있었다.
전쟁 중인 혼란의 나라,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가족과 동료를 생각하며 눈 내린 산을 밤새 걸어 첩보 내용을 암기해 돌아오는 소녀들의 모습이 연상이 연상된다.
첩보원 소녀들의 목숨을 지켜주려던 군인도 있었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 그들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던 군인도 있었다. 그리고 첩보원 활동에 충실한 래빗들을 끝없이 의심하는 군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래빗들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소리 없이 사라져간 이들을 기억하는 남은 소녀들의 두려움에 깊이 공감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 죽음과 배신과 변절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자기 편인지 끝없이 의심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게 바로 전쟁의 잔인함이다.
이 소설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도 좋을 만큼 역사성과 흥미성을 동시에 간직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첩보원 활동을 하는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성과 허구성을 잘 담아낸 장편소설이라고 느꼈다.
또 소설 속 군인이 언급한 숭고한 희생의 가치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게 한 작품이었다. 첩보원 소녀의 입장에서, 래빗을 적진으로 들여보내는 지휘관의 입장에서, 각각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준 책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