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잊혀진 여섯 개의 세상
유진서 지음 / 바른북스 / 2023년 6월
평점 :
"3세계에 태어난 건 그들의 잘못인데 우리가 도와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가 확 쏠리는 듯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그래도 우리처럼 행복한 사람은 남을 도와야 해요. 남을 돕는 건 사실 우리가 도움을 받는 거랍니다. 도움으로써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고, 우리의 성품을 다듬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3세계의 사람들이 존재한답니다."
선생님의 말은 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3세계를 돕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요. 3세계에서 우리에게 보낸 물품들을 사용할 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돼요. 따라 해볼까요? 고마워, 3세계."
p.77
"시스템은 우리를 반역자라고 치부하지. 그저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설을 마구 폭파시키는 무뢰한들로 말이야.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은 돔 밖에서도 살 수 있느냐, 혹은 세계들을 어떻게 통일하느냐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거야."
"75, 이해해. 넌 3세계 출신이지? 반-시스템단의 대부분이 3세계 출신이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없었겠지. 생각 자체가 잘못이잖아? 우린 답을 얻어내야 해. 답을 얻어내고 세계들을 통일해야 해. 그게 반-시스템단의 존재 이유야."
pp.131~132
그 정도로 사악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비록 기계가 전부 복구돼서 3세계의 일을 대신할 수 있지만 딱히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나 같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눌렀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부모님 같은 사람들이 기계처럼 다뤄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요.
p.205
비슷하게 달렸을 때가 있었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태양을 향해 언제나 나를 위했던 친구와 함께 달렸을 때.
하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이제는 닿지 못할 지점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가 지면이라는 똑같은 층에 서 있었으니까.
p.267
유진서, <잊혀진 여섯 개의 세상> 中
+) 이 소설은 가상 현실인 듯하지만 실제 미래 현실의 모습이 될지도 모르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대한 돔 안의 여섯 세계는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나뉘어 있고, 제3세계에서 살아가던' ZG-75'는 부모님을 찾아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ZG-75의 부모님은 자식이 지금의 환경과는 다른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했고 위험하지만 도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과 달리 ZG-75의 곁에서 이제 부모님은 사라졌고, ZG-75는 부모님을 찾아 힘든 도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게임 속 세상과 가상 현실 속 세상을 오고 가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게임 속 캐릭터나 공상과학 영화 속 캐릭터처럼 움직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 또한 가상 현실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어쩌면 그런 배경은 고등학생인 저자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연상되어 더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은 신분 혹은 계급, 누가 정한 것인지 모를 그 기준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구분하고 사람들을 판단한다. 세상도 사람들도 더 낮은 계급과 더 높은 계급으로 나누어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낮은 계급 사람들의 존재 가치나, 그들도 동일한 인간임을 느끼는 동질 의식 혹은 인류애 같은 것은 없다. 평등이나 자유를 생각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등급으로 신분이 정해지고 자기 신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 고민이 이 소설에 녹아 있지 않나 싶다.
돔이라는 틀 안에서 여섯 개의 세상으로 나뉜 채 살아가는 것. 누군가는 자기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도전하고, 누군가는 자기 세계에 만족하며 안주하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자기 세계에 대한 신세 한탄으로 살아가며, 누군가는 이렇게 나눈 세상의 틀 자체를 깨려 시도한다.
틀을 깨려는 움직임. 이것이 저자가 이 소설을 쓰며 어떤 생각과 바람을 갖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지 않나 싶다.
저자가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장편소설의 스토리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과 안정적인 서사적 구성이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