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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스파이 유리
박현숙 지음 / 좋은땅 / 2023년 5월
평점 :
안 그렇다 해도 달리 방법도 없고 걱정해 봤자 자신을 그만큼 더 힘들게 만드는 것뿐임을 유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겪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상황도 운명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린 유리는 이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디로든지 갈 것이고 또 갈 자신이 있었다. 이동하는 차 속에서도 어디서도 긴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금방 편히 잠을 청할 수도 있었다. 어떤 속박과 제한 속에서라도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쉽게 태연할 수가 있었다. 몸은 구속되어 있어도 마음은 최대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p.46
"너희들도 이것을 생활화해서 체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극복해 나가는 데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하루도 운동을 안 하면 몸이 불편하고 사지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도록 체질을 만들어야 된다!"
p.68
그냥 이렇게 해서 다 잊을 수만 있다면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살 수 있겠다! 살아 볼 만하겠다! 잊어야 될 일은 잊어버리겠다! 살아야 되겠다!"
p.119
어릴 때 천만년 후에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산들도 들판도 철석바위들도 없었다. 무참한 실상은 허무를 넘어 잔혹하고 적나라했다. 무서운 절망 속의 소름 끼치는 외로움이었다. 먹먹한 가슴이 숨을 조였다. 온 힘이 다 빠지며 백사장에 엎어지고 말았다.
고향도 잠시 인연의 구름 같은 것이구나. 허상이구나! 고향은 기억과 애착이 만들어 낸 몽환이고 착각이구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구나!
p.343
"워낙 큰돈을 쥐면 즉시 정신이 황폐해지니까, 공허해집니다."
"그러니 가진 돈을 과시해서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를 알아주는 것만 같아 자존감을 느낍니다."
p.385
박현숙, <KGB 스파이 유리> 中
+) 이 책은 어린 나이에 KGB에 납치되어 KGB 요원으로 성장한 '유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품을 직접 준비해서 로켓을 만들어 발사하는 취미가 있던 유리는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어 러시아로 가게 된다. 한동안은 가족과 부모님을 잊지 못해 힘들어했지만, 점점 자기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 그 마음을 접고 환경에 적응해 간다.
유리가 다니던 학교는 KGB와 소련군 고위 관부 자녀들이 많았고, 유리는 그곳에서 군대식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부드러운 부탁처럼 들리는 친구 아버지의 말은 고위직의 명령이기에 거역할 수 없다는 것도 거기서 배운다. 그렇게 유리는 성장하며 여러 훈련을 받고 스파이 요원으로 활동한다.
이 소설에는 모스크바, 평양, 서울 등 러시아, 북한, 남한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스파이 활동에 충실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삶에 적응하던 유리. 그가 남한에서의 활동 지령을 받으면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떠올라 힘들어한다.
그러나 자기가 KGB 스파이 요원이라는 걸 들키면 본인과 부모님 모두 난처하고, 소련과 남한 모두에서 버림받을 거란 사실에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른다. 이런 부분을 보면서 혼자 로켓을 만들며 좋아하던 어린 소년이, 철저한 훈련과 교육을 통해 감정을 절제하는 군인으로 성장했다는 점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유리가 모스크바, 평양, 서울에서 지내면서 각각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현실감 있게 다뤘다고 생각했다. 정말 북한 고위 간부들의 모습을 조명하며 그 시기의 상황을 재현한 듯했고, 남한을 묘사할 때 역시 당시 정치권의 모습과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제시했다.
그런 장면은 대부분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구사했는데, 그 대화 속에서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인 야욕을 함께 엿볼 수 있다. 물론 소설이기에 허구적인 면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읽어야 하지만,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긴 분량이었지만 개연성 있는 서사라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공간적 배경이 다양해서 혹시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스파이 소설의 속도감을 느끼며 약간의 사회적 정세를 배운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