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남경지 지음 / 오모리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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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소리 안 들리는 집에서 살고 싶어."

약간 노란 끼가 도는 냉장고는 이사하는 원룸마다 기본 옵션으로 있었다. 어디서 단체로 공동구매하는 듯한 비슷한 규격의 냉장고, 내 키보다 조금 작은 냉장고는 간헐적으로 윙윙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위잉 꾸르르르륵. 칵, 우우우웅.

"방문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나는 방문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현관문이 아니라 방문, 방 한 칸에서 빨래를 널면 집 전체가 꿉꿉하고 눅눅해져. 그 상태를 방치하면 쉰내가 날 수도 있어. 우리 집 선풍기는 나보다 빨래가 더 자주 써.

pp.7~9

"쉬고 있는데도 쉬는 게 맞나 싶더라. 컴활 강의 찾고 책 펴서 세 페이지 정도 보는데 집중이 너무 안 돼. 그래도 해야지 싶어서 삼일 정도 공부하다가 현타가 세게 왔어. 내가 진짜 하고 싶은걸 하려고 퇴사했는데, 어느 순간 또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억울하더라. 취업준비, 해야 하는 건 맞는데 지금은 안 하려고. 내가 해 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부터 차근차근 하려고."

컴활을 깔끔하게 뒤로 미룬 친구는 목공을 배우고 있다. 이유는 심플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집에 돌아왔다. 불을 켜며 친구의 심플한 대답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 글쎄.

해야 할 일들이 먼저 보인다. 집이고 밖이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아니 해야 할 일만 너무 남겨놨다. 오늘도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할 일에 완패했다.

pp.18~19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로 아낌없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사람. 취향과 호가 분명해서 그 주제로는 누구와도 즐겁게 얘기할 준비가 된 사람. 굳이 자랑하지 않고 즐겁게 자기 취미를 즐기는 사람.

p.20

자괴에 허우적거리던 우리는 자괴 통장을 만들었다.

자괴감이 들거나 우울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때마다 1,000원씩 입금하기로 했다.

나는 주로 밤에, 자정 은행 점검 시간을 피해 입금했다. 5평짜리 원룸의 밤은 사람을 가라앉게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자괴 통장의 장점은 자괴의 실체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괴 통장에 돈이 모이지 않기 시작했다. 자괴는 돈 내가 할 만큼의 값어치가 없는 활동이란 걸 서서히 알게 된 시점이다. 입금할 때마다 우리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괴감 가질 만한 일이었나. 영양가 있는 감정인가. 이런 의심은 자괴를 우습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괴의 기록만 남아있지 그 원인은 흐릿하다.

pp.43~45

성실하고 부지러한 사람이 장기간 목표지점으로 삼는 이벤트가 있다. 입시나 취업처럼 어딘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자잘한 계획과 성취를 반복한다. 매일 쓰는 스케쥴러, 공대생이지만 혹시 모를 한국사 자격증,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토익, 전공 학점, 석사과정을 위한 대학원 등.

한 방향으로 똑같이 반복해서 저으면 가라앉는 불순물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상은 한 방향으로 성실하게 반복하면 자꾸만 가라앉는다. 디노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돈으로 의지를 샀다. 이전과는 다른 성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야, 사람이 뭘 자꾸 하려고 하니까 불행한 거야. 아무것도 안 하면 행복해."

pp.55~56

"마흔 전에 평생 쓸 돈을 벌 거야.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멋진 차를 끌고 소소한 일거리를 하며 살래. 내가 싫은 일은 No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여유가 생기면 떠날 거야."

p.88

남경지, <5평 집에서 뭐하고 지내?> 中

+) 이 책의 저자는 3평 원룸에서 살기 시작해 5평 원룸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원룸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본인처럼 1인 가구로 원룸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담아냈다.

이 책은 원룸의 생활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원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원룸이라는 작은 공간이 주는 특징을 살린 책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20대와 30대의 사회 초년생이 제일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선택하게 되는 공간이 작은 원룸이다. 그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집에 대한 환상보다 집이라는 공간의 현실을 먼저 익히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다짐한다.

이 책에는 저자의 이야기는 물론 원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더 나은 삶을 다짐하며 부캐를 활용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목표를 위해 성실하게 살면서 좋아하는 취미를 갖는 사람도 있다.

회사에서 방전된 에너지를 사람을 만나면서 충전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공간에서 둘이 동거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돈을 모아서 더 넓은 공간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도 있고, 미니멀리스트로 적당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5평 공간에서 지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라고 했다. 아마도 원룸에서 살면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 혹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현재는 7평 공간에서 지낸다고 하니 저자는 퇴보가 아니라 분명 전진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원룸이라는 공간의 생활을 잠시 엿볼 수 있어서 새롭고 좋았다. 꼭 측은하게 볼 필요는 없다. 요즘의 원룸은 풀옵션이 대부분이라 여러 가지 신경 쓸 필요 없이 거주할 수 있어서 장점도 많다.

하지만 저자가 냉장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이나, 방문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말은 꽤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표현이라 마음속 깊이 다가왔다.

그러나 평수가 조금 더 넓은 집에도 냉장고 소리는 들리고, 빨래를 널면 꿉꿉함이 집에 맴돌기도 한다. 어차피 비슷하다. 역시 주거하는 공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비슷한 환경에서 약간 다르게 사는 1인 가구의 모습과 가치관을 볼 수 있었던 책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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