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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점 ㅣ 세계사 시인선 128
배한봉 지음 / 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된 나무
묘목을 심기 위해
오래된 복숭아나무를 벤다
톱날이 지날 때
바람이 불었다
톱밥 들어왔는지 눈이 깔깔해지고
훅, 밀려오는 생목 냄새
칼칼한 목을 적신다
이마 땀을 훔치며
고목의 흔적인 그루터기를 본다
가장자리, 손가락만한 구멍들
속에 굼벵이가 잠들어 있다
나무는 늙어가면서
제 몸을 벌레들에게 바친 것이다
해마다 복사꽃 피기 전에
나는 병충해 약을 뿌렸고
나무들은 단단한 열매를 맺어 왔다
그 독한 약 기운에도
굼벵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벌레 파고 들어간 구멍을
나무가 새살로 막아주었기 때문
햇빛이 그루터기를 비춘다
꿈틀, 굼벵이가 실눈을 뜬다
아직은 이른 봄
굼벵이는 그 속살을 갉아먹으며
우화를 기다렸던 것이다
밥을 위해 나는
약을 치고 나무를 베어 내지만
나무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에게
자기 몸과 영혼을 다 준다
우리들의 부모님처럼
그때서야 나는 왜
오래된 나무에는 정신이 깃들인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지 알았다
톱밥 속에 굼벵이를 놓아주며
까닭 없이 눈에 톱밥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배한봉, 『악기점』中
+) 이 시집은 자연에서 깨달은 삶에 대한 교훈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농작물을 기르면서 꽃, 열매, 나무, 벌레 등을 통해 알게된 자연의 이치를 엮어 놓은 책이다. 그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생태계 환경에 친밀하다. '우주-자연-인간'의 관계가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설명되어진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으며,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부분이 된다. 그리고 우주의 순환 고리의 하나로 형성된다. 그 순환의 반복으로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순수하고 맑다. 그 순수함으로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건내고, 그들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소망한다. 자본과 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 환경을 비판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사랑하길 호소한다. 농업이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그의 말처럼, 이 시집은 농업을 일상 생활로 여기는 화자가 끝없이 등장한다. 시인 자신으로 보이는 그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읽는 독자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은 진실, 그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그는 강조한다.
그가 언급했듯이 그의 시는 '믿음이 주는 소박한 가치들 속에 사랑이 있고, 생명존중사상이 있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따뜻한 꿈이 있'다. 그의 노래는 삶을 아름다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바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