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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도어 프라이즈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1월
평점 :
매일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오솔길은 평온하다. 제이컵은 평온을 누리고 싶었다. 평온이 어렵다면 최소한 고독이라도 말이다.
고등학교라는 세계에서 똑같은 외톨이 신세인 제이컵과 트리나가 이대로 가만히 서 있으면, 아이들의 흐름 역시 강물이 커다란 바위를 지나치듯 그대로 그들을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컵은 길 한가운데 그대로 서서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지, 아니면 자신에게는 움직여 피해 갈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듯 그대로 부딪쳐 넘어뜨려버릴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내심 들었다. 요즘 그의 마음속은 깜깜했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pp.88~90
"카트리나. 물어보려고 했었다. 최근 엄마한테 소식 들은 거 없니? 아무것도 없어?"
그러자 아이는 가느다란 담배를 쭉 빨아들이더니 자갈 위에 밟아 껐다. "없어요. 피트 삼촌. 삼촌은요? 하느님한테서 소식 들은 거 없어요?"
"들었다고 믿는다. 길가에 서 있던 널 본 그 순간 말이지."
pp.126~127
"넌 저 기계를 어떻게 생각하니? 벌써 해봤니?"
"아뇨, 선생님. 전 제가 뭐가 될지 이미 알거든요."
"지혜의 말 같구나. 인상적이다."
"또, 저런 물건에 2달러를 쓰기도 싫어요. 저축하는 중이거든요."
"그것도 현명한 말 같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구나."
"감사해요. 선생님 수업이 그립네요. 그러니까 학창 시절 말이에요. 이젠 일이니 뭐니 바빠져서 그때처럼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요."
"다행히도 책 읽기는 자전거 타는 거랑 비슷하단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p.192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경탄을 금치 못하는 건 이 특정한 일화가 펼쳐진 방식 자체였다.
문제가 무엇인지 (베풀어야 하는가, 베풀지 말아야 하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가로이 다가오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찢어 열어버린다는 (어째서 아직까지 베풀지 않았느냐?)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런 베풂을 아주 많이 실천하신 예수님 역시 꽤나 근사한 분이라고 피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가 피트 개인이 품은 신앙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안심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식의 독단이 아니라, 당신보다 먼저 그리고 때가 오기 전 먼저라는 물질적 의미와 언제나 네가 그리고 언제나 지금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인적인 이해를 담은 사고였다.
pp.206~207
왜 기분이 좋은 거냐? 트리나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게 분명한데 말이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저 제 몫을 하고 싶어요. 돕고 싶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조심하려무나 피트, 너는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모든 걸 다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그런 건 자만처럼 느껴지는구나.
pp.387~388
M. O. 월시, <빅 도어 프라이즈> 中
+) 이 소설은 미국의 한 작은 마을 식료품점에 '디엔에이믹스'라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디엔에이믹스는 사람들의 DNA 분석을 통해 진짜 자신의 운명과 미래, 이를테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지, 자기가 어떤 운명으로 태어났는지 등을 알려주는 기계이다. 2달러만 있으면 자신의 운명을 가르쳐주는 셈이다.
작은 마을은 이 기계로 인해 발칵 뒤집힌다. 많은 사람들이 디엔에이믹스가 보여준 자신의 진짜 운명을 믿고 현재의 안정적인 직업을 떠나 주어진 운명대로 살려고 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굳건히 믿고 현재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학교 교사인 더글러스는 이 기계를 만나기 전에 계속 자신이 꿈꿔온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교사를 그만두고 트럼본을 배우며 남은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말을 아내에게 하기 직전에, 디엔에이믹스로 인해 일상이 꼬여버린다. 게다가 그의 DNA 검사 결과 그는 휘파람 부는 사람이자 교사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이는 없지만 부부 둘이 행복하게 지내온 더글러스와 셰릴린, 쌍둥이 형 토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방황하는 제이콥, 토비의 죽음에 비밀이 있다며 제이콥을 뒤흔드는 형의 여자친구 트리나,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지만 조카 트리나의 방황으로 고민이 많은 신부님 피트 등등이 그들이다.
자신의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는 것으로 알며 살아온 이들이 주어진 운명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디엔에이믹스의 결과지를 그대로 믿고 현재의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운명을 수용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기계에 2달러를 쓰는 것조차 아깝다며 자기 운명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결과지를 보며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부분을 보면서 인간에게 운명이란 무엇인지, 인간에게 미래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디엔에이믹스가 우리 동네에 생긴다면 어떨까. 나는 호기심에 한번 해보겠지만 현재의 상황을 완전히 버리고 그것만을 믿고 따르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의 성향이 다르듯 선택도 다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의 운명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본인의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엔에이믹스의 결과지를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사람들의 선택이며,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것도 사람들의 선택이다. 결국 운명을 만드는 것도 이끌어가는 것도 개인의 선택인 셈이다.
형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제이콥의 모습을 보며 무척 마음이 아팠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 철저하게 외면받은 트리나의 아픔도 깊이 이해되어 무척 마음아팠다.
이 소설은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청소년들의 방황하는 성장담이 녹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신앙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결코 가볍게 다룰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