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신화
손홍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모든 걸 소유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몇몇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거라면, 아무도 소유하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사람의 신화」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 그 자국을 확인해볼 용기가 없었다. 두려웠다. 바람에 실려오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냄새는 분명히 그곳에서 시작되었지만 나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것도 환후각은 아닐까. 나는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그러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재일까. 그가 믿고 있는 게 어쩌면 그에게 현실일 수도 있었다.

 

「바람 속에 눕다」

 

그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야. 누구도 무시 못 할 만큼 커지거나,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아지거나.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야.

 

 

나의 추락의 속도를 늦추거나 늘리는 건 곱다시 내 몫이란 걸. 그런게 운명이라면, 친구야, 나도 운명을 믿는다.

 

「너에게 가는 길」

 

손홍규, 『사람의 신화』中

 

 

+) ::참관기- 작가와의 대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가 있다>

 

계단 위로 한 남자가 서 있다. 저 사람,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어디서 보았을까.

 

기억은 늘 머뭇거리는 사이에 지나가는 법이다. 그렇게 그를 스치면서 나는 나의 기억을 의심했다. 비슷한 사람을 보았겠지.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가 없잖아.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고자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어렴풋한 기억은 과거의 경험보다 현재의 상상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으니까.

 

나보다 다섯 계단 위에 서 있던 그가 소설가 ‘손홍규’라는 사실을, 나는 정확히 1분 뒤에 알았다. 더불어 소설을 읽으며 잠깐 들여다보았던 그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 몇 초 동안의 시간이 나로 하여금 그를 낯설지 않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익숙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

 

“최근 문단의 주목을 받는 뜨거운 감자, 손홍규 소설가와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평론가 고인환의 재치 있는 소개로 <작가와의 대화>는 한결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고인환은 발제문에서 ‘근대와 근대 이후, 비현실과 현실, 비인(非人)과 인간’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단편들과,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귀신의 아우라’가 빛을 발하는 장편을 주목하였다. 발제자의 발표가 끝난 후 작가의 변을 요하는 눈빛들이 간절해졌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는 “작가조차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준 글이 아닐까 싶어요.”라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거시기, 제가 말을 잘 못해서요.”를 수없이 반복하며 쑥스러워했지만,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손홍규라는 소설가가 ‘구분 짓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현실과 신화, 삶과 죽음, 귀신과 인간, 정신과 육체 등의 경계에 대해 그가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고인환의 주장대로 그의 소설은 경계에서 머뭇거리거나 어느 한 쪽으로 한 걸음 들어선 면모를 보인다. 물론 한 걸음 들어섰다가도 금세 또 한 걸음 물러서기도 하지만, 그 틈에서 주변을 차분히 둘러보며 신중하게 움직인다.

 

아마도 그가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구분 지어 이야기하는 평론가들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답변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저는 근대 이전, 이후 등의 여부를 고려해서 쓰기 보다는요. 80년대를 동시대로 보았는데, 그게 요즘은 60년대, 70년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근대 이전, 이후 등의 구분은 규격화된 사고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가 언급한 규격화된 사고가 바로 ‘틀’이다. 작가는 특정한 선을 그어 사고를 이분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틀을 만들어 생각을 끼워 맞추고, 그것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부자연스러움에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한다.

 

일부 단편 소설의 결말을 상징적으로 끝내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단편에서 결말을 짓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요. 장편의 입장에서 단편을 보면 시가 아닐까 싶어요. 다만 장편은 결말이 필요하겠지요. 단편에서 선명한 결론은 도그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신화나 전설을 통해 끝없이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사이에는 사람이 있으며, 고향이 있고, 영혼(귀신)이 있으며, 과거(기억)가 있다. 그는 그 사이에서 소통의 싹을 틔우는데, 사람은 물론 고향과 영혼, 과거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공간을 갈망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작가는 특별히 그 ‘사이’에서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가 머무르고 싶은 시공간에 서 있으려 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의 소설이 반성적 성찰에 머무르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들의 반복으로 손홍규 소설만의 개성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바람에 실려오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냄새는 분명히 그곳에서 시작되었지만 나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것도 환후각은 아닐까. 나는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그러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재일까. 그가 믿고 있는게 어쩌면 그에게 현실일 수도 있었다.

 

「바람 속에 눕다」부분

 

 

작가는 사소하고 여린 것들에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것이 과거의 기억이든, 과거의 사람들이든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이 소설들은 지금까지 나를 길러준 것(과 사람들)에게 바치는 나의 고백이다.”로 작가의 말은 시작된다. “내가 지니는 시간을 옭아맬 수 있는 수단은 기억과 기록”뿐이라며 소설에 기억(과거)을 담아두려 한다. 우리가 머뭇거리며 보내버린 시간들을, 그 기억들을 그는 소설로 간직하려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존재들이 소소한 것일지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슴에도, 종이에도 또렷하게 새기고 있다. 손홍규는 분명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귀신의 시대’를 읽으며 나도 그처럼 혼자 키득거리다가, 아! 하고 슬픈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단숨에 읽어버리곤 홀로 키득대기도 했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작가의 말」부분) 한없이 진지하다가도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다니, 꼼꼼한 서사와 위트 있는 문체가 흥미로웠다. 대담 중에 “사람이 일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아요.”라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마치 새벽에 라디오를 들을 때처럼 소설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마음이 뒤척거렸는지 모른다.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수용하려는 그의 태도가, 이런 양면적인 문체를 끌어내는 것이다.

 

조화, 혹시 그가 바라는 것이 그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조율, 사람과 귀신의 대화, 사람과 세상의 소통 등 그는 이런 조화로움을 소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몸에 밴 습관처럼, “세상에 대한 투정을 안고 살아간다”고 고백했다. 아마 그것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자신의 몫이라는 것도 짐작할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그는 세상과의 소통에 있어서 비교적 냉담하게 다가서는 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어떤 틀을 만들지 않고,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숨쉬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잊지말아야 할 것들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려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가 있다.

 

이제 나는 계단 위에 서 있던 그 남자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손홍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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